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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Sep 22. 2023

사랑은 현재 진행형 <세예라자드>

하루키의 한마디

살면서 한 번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사랑이 뭐냐는 골치 아픈 질문을 차치하고서, ‘그 사람’만을 간절하게 원했던 순간이 없는 사람은 흔치 않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운명적인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사랑이라는 열병에 걸린다. 특히 항체가 없는 어린 시절에는 더 치명적이다. 나로 말하자면, 비가 뚝뚝 떨어지는 밤, 울면서 매달려 본 기억이 있다(뿌리치고 가는 걸 세 번이나 붙잡았다).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마음속에서 어떤 기쁨이 솟구쳐 올라서, 온갖 내장을 간지럽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 그 감정이 사랑이었냐고 '다시' 묻는다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글쎄, 좋아한 건 맞지만… 어린 나이의 객기였을지도, 본능적인 정욕이었을지도, 아니면 지겨워진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얼버무릴 것만 같다. 물론 내게도 첫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있지만, 함께 했던 시간과 나눴던 많은 것들 때문에 마지못해 내린 결정처럼 어딘가 개운하지 못하다. 그건 너무 비겁하다고 누군가는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조금 솔직해지도록 하자. 당신의 모든 연인이 전부 진정한 사랑이었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일 때만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다른 형태로 변해버리는 것만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셰에라자드」

서른다섯,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둘 있는 전업주부 셰에라자드(주인공 하바라는 그녀를 천일야화의 왕비 '셰에라자드'라고 부르는데, 그녀가 하바라와 성교할 때마다 흥미롭고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기 때문이다)는 고등학생 때 그런 열병을 앓았다. 축구선수에 키가 크고 성적도 우수했던 같은 반 남자애였다. 하지만 "여고생의 사랑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무단결석하고 비어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물론 치밀한 사전 조사에 근거했다). 운 좋게도, 현관 매트 밑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연다. 2층 그의 방으로 올라가 그의 소지품들을 만지고 느끼며 입 맞춘다. 결국 그녀는 그의 연필을 한 자루 훔치고, 교환의 의미로 탐폰을 가장 깊숙한 서랍에 두고 떠난다.


그 남자애를 향한 욕망과 범죄의 스릴에 중독된 셰에라자드는 빈집 털이를 반복한다. 들키기라도 하면 퇴학은 물론 정상적인 생활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는 걸 알지만, 냉철해질 수 있다면 그건 열병이 아니다. 점점 대담해진 그녀는 빨래 바구니에서 땀에 젖은 그 남자애의 셔츠를 찾아낸다. 그녀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퀴퀴한 체취'. 위험한 줄 알면서도 결국 그 셔츠를 훔친다. "그녀의 머리는 마음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남자애의 집에는 자물쇠가 새로 달렸고 열쇠는 더 이상 현관 매트 밑에 없었다. 타의에 의해 빈집 털이를 그만두고 나서, 그 남자애를 향한 셰에라자드의 동경심은 서서히 옅어지고, 열병도 낫는다.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셰에라자드의 경우 다소 과격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미친 짓을 저지르고는 한다. 그런데 어떤 계기에 의해서(충격적인 결점을 발견하거나, 거절당하거나, 외부 환경에 의해 멀어지거나, 심지어는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질 정도로 감정이 식어버린다. 완전무결했던 외모는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장점은 단점이 되고, 일말의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얕은 해안에 슬슬 썰물이 지듯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같은 컷이 다른 상황에 연출되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 톰이 연인 썸머를 회상하는 순간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와 차였을 때 톰의 내레이션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상반된다.


헤어지기 전과 후, 주인공 톰이 느끼는 썸머의 모습 변화. 색 보정이 미묘하게 다른 디테일을 엿볼 수 있다 <500일의 썸머>


과거의 셰에라자드가 그 남자애 침대 위에서 셔츠의 체취를 맡을 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욕을 느낀다. 현재의 셰에라자드ㅡ하바라와 관계 후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들려주는ㅡ는 처음으로 하바라를 '이름으로' 부르며 다시 한번 관계를 가져주기를 부탁한다. 둘 사이의 섹스는 이제껏 어떤 감정도 없는 사무적인 행위였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부드럽게 안쪽 깊숙이까지 젖어 있었"으며, 마지막에 "확실한 오르가슴"을 느끼며 "거칠게 경련"했다. 그녀는 군살이 붙고 주름이 늘기 시작한 서른다섯의 주부가 아니라, 누군가를 간절히, 순수하게 갈망하던 열일곱 살 소녀로 되돌아가 있었다.


셰에라자드와 나란히 누운 하바라는'칠성장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셰에라자드는 자신이 전생에 칠성장어였다고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하는 친밀한 시간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에 슬퍼한다. 어쩌면 셰에라자드가 말했던 한마디와 반대로, 빛이 바래 보이던 누군가 찬란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얻길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전생에 칠성장어였다면 나도 내 전생이 칠성장어이고 싶어       한국학중앙연구원 송호복 2003


종종 좋아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누군가와는 헤어졌고, 누군가에는 거절당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 이제 와 그들의 모습을 찾아보면, 사랑스럽지도 않고, 당연히 설레지도 않는다. 묘한 아련함만이 가슴을 쿡쿡 찌른다. 그러나 단순히 콩깍지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 시절에 나는, 그 사람과 그렇게 사랑에 빠졌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인생이란 묘하다.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과 대책 없는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의 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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