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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Sep 14. 2023

이해와 오해 사이 <드라이브 마이 카>

하루키의 한마디

김소연 시인이 말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마음사전》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오해해야 한다. 중요한 건 ‘최선’인데, 오직 ‘가장 잘한 오해’만이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지만, 이 세계란 원래 모순으로 가득 찬 덩어리 아니던가. 오히려 세상 사람 모두,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그게 더 끔찍할 것만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는 중년 연극배우다. 연기를 하면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좋았기 때문에 배우가 됐다. 그의 아내도 배우며,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작스럽게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세상을 떴다. 그녀를 잃은 슬픔만큼 가후쿠를 괴롭히는 것은 한 가지 의문이다. 그녀는 왜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을까. 두 사람은 결혼한 이래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가후쿠는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가후쿠 혼자만의 오해가 아니었다면. 그 이유를 알아낼 방법은 더 이상 없지만, 유추해 볼 수는 있다. 가후쿠는 우연히 아내의 마지막 외도 상대를 만나고,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그와 잤던 아내의 마음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다. 몇 번의 만남으로 마음의 문을 연 그가,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가후쿠에게 건네는 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가후쿠였다면, 그에게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르겠다(성격상 못했을 것 같지만). 내 아내와 바람을 핀 남자가, '나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게 타협하라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숙련된 배우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남자의 말이 옳았기 때문일까. 가후쿠는 그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다. 이후 대목에서는 오히려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뭔가 통해버린다(‘하루키스러움’이 조금 과하다!).

James Ensor <Self-Portrait with Masks> 1899

배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나’라는 가면을 쓴다. 우리가 진심으로 욕망하는 것은 가면 뒤에 감추고,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내비친다. 욕망이라는 게, 그다지 향기 나며 아름다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가면이란 우리가 이해받길 원하는 모습이고, 욕망이란 우리가 오해라고 변명하는 진심이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대사를 까먹는 삼류 배우처럼, 종종 가면 뒤의 모습이 튀어나와 버리고는 한다. 우리가 이해와 오해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욕망 즉, 가면 뒤의 나 자신뿐이다.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산 탓에 내 진짜 얼굴이 어땠는지 잊어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뭐 하고 싶어?’라는 질문이 무섭고, ‘결정장애’가 유행처럼 번졌다. 선택에 앞서 ‘아무거나’라고 내뱉는 습관 역시 관련이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가면을 벗는 게 너무 두렵다. 마치 코로나 기간 동안 썼던 마스크를 마침내 벗었을 때, 속옷을 안 입은 듯한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느낀 경험과도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가면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우리 자신의 가면부터 벗어 보여주는 게 순서다.  


이것은 마스크가 아니다


가후쿠는 아내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해니, 오해니, 가면이니, 욕망이니 해도 세상에는 결국 불가해한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하루키는 이것에도 명쾌한 처방을 내려준다. 그건 병 같은 것이므로,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도 별 수 없다. 그냥 꿀꺽 삼키고 살아가는 수밖에. 쿨하고 속 편한 하루키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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