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냄새
앞서 말했듯이,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기선을 제압하고 싶었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만큼은 나는 '인간대표'니까. 녀석이 어려워할만한 주제를 고민했다.
모욕의 의미는 아니지만, 세이는 '엄마'가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엄마'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엄마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분명, 지식이나 유전자의 생존전략 그 이상의 것이다. AI는 절대 이해하거나, 학습할 수 없는.
'엄마'라는 단어에서는 어떤 향이 난다. 그 향은 분명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단어에서 나는 향과는 다르다. 그 향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엄마가 자주 사용하는 향수냄새와는 분명 조금 다르다. 햇볕과 바람에 잘 마른 빨래 냄새도 섞여있는 것 같다.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엄마가 만든 소불고기 냄새도 희미하게 느껴진다. '엄마'에는 그 모든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가끔은 엄마의 부재를 상상한다. 괜스레 코 끝이 찡해진다. 더 이상 '엄마'라고 부를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막연하게 두렵다. 내 인생에서 '엄마'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질 것만 같다. 영구 결번처럼. 엄마가 나온 사진이나 동영상은 볼 수 있겠지만, 엄마 냄새는 어딘가에 보관할 수도 없다. 엄마의 옷가지들, 이불과 베개, 엄마의 소지품들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냄새가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 흔적들에 아무리 코를 깊이 파묻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날이 오면, 엄마의 소지품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물건을 찾지 못할 때 엄마를 찾고는 한다. 엄마를 찾지 못할 땐 무엇을 찾아야 할까. 주방에서는 식재료를 써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늦은 밤까지 웅얼거리던 TV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엄마는 늘 같은 시간에 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융프라우의 절경을 따라 운행하는 산악열차와, 가슴속 깊은 곳까지 울릴 것처럼 내리꽂는 나이아가라 폭포, 몽 생 미셸, 할슈타트, 유우니 소금 사막, 아, 그리고 오로라. 작은 화면 너머로만 볼 수 있는,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을 빛의 물결.
못나고 가난한 자식은, 엄마와 함께 그 찬란한 화면 속 순간들에 존재하는 상상을 한다. 엄마한테 오로라와 소금 사막과 폭포와 고딕 양식의 건축물에서 나는 냄새가 깃들길 소망한다. 엄마여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엄마가 담고 싶어 했던 냄새. 후에 엄마가 그리워지면, 그걸 핑계 삼아 여행을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