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긴 머리를 곱게 두 갈래로 땋고 탁아소에 다녔다.
머리를 땋아 준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
뒤꼍 처마 밑 봉당 아래 자그마한 앉은뱅이 돌멩이가 하나 있었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나를 거기에 앉히고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가지고 묻히면서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겼다.
참빗 꼭지로 이마부터 뒷목까지 가르마를 가르고는 한쪽씩 머리를 땋아 주었다.
머릿결에 닿는 아버지의 손길에는
혹시나 엉킨 머리카락을 잘못 빗어 딸내미가 아파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과 섬세함이 있었다.
다 땋은 양쪽 머리끝을 풀어질세라 검정 고무줄로 여러 번 돌려 질끈 묶는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비뚤어지지 않았나 하고 앞에서 딸내미 머리와 얼굴을 살핀다.
부엌에서 이런 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엄마가 늘 하던 말이 있다.
“누가 보면 데려온 자식인 줄 알겠네!”
싸고 끼고도는 것이 마치 밖에서 낳아 데려온 딸인 것 같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어린 마음에 “나는 분명 다리 밑에서 주워 왔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와 오빠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어느 날 엄동설한에 다리 밑에서 울고 있는 너를 아버지가 주워 주머니에 넣어 왔다”라고 나를 놀려댔다. 나는 하도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기에 정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나중에 커서 친엄마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친엄마가 부자였으면 하던 차에
여름휴가철이면 우리 동네로 놀러 오던 피부가 뽀얀 부인이 우리 엄마가 아닐까 상상을 하곤 했다.
엄마가 외갓집에 갈 때도 언제나 나만 두고 갔다.
엄마의 핑계는 언제나 같았다.
셋 중에 하나는 걸릴 수 있고 하나는 업을 수 있지만
중간인 나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엄마와 오빠 동생이 부재한 며칠 동안,
나와 아버지는 마치 홀아비와 딸처럼 지냈다.
온전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식구들을 손꼽아 기다릴 리 없다.
아예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영락없이 며칠 후 엄마는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머리 위에는 외할머니가 바리바리 싸주신 맛 난 음식을 이고 돌아왔다.
다음은 훗날 엄마가 나에게 해준 말이다.
“아 글쎄, 어둑해질 저녁에 싸리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기척이 없더라구,
연기 나는 부엌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는지 시꺼먼 게 둘이서 눈만 반짝거리며 말똥말똥 굴리며 쳐다보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원!”
어쨌거나, 아버지의 손길로 잘 땋은 양 갈래 머리를 하고 다니면, 동네 아줌마들이 “뒤통수가 어쩌면 그렇게 동글동글하니 예쁘니?”하며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나의 손을 잡고 동구 밖 이발소로 데리고 갔다.
영문을 물을 새도 없이 두 갈래 머리를 뎅강 잘라 버렸다.
이유는 이가 많이 생겨 더 이상은 놔둘 수 없다는 것과,
엄마가 땋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땋아 줄 새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발소 아저씨는 이발소 의자에 널빤지를 얹더니 나를 그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온몸이 덮이는 꼬질꼬질한 보자기를 씌웠다.
자르기 싫다고 항변할 겨를도 없이 나의 머리카락은 뎅강뎅강 잘려 나갔다.
의자 밑을 내려다보니 곱실곱실 한 나의 긴 머리카락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채
이발소 바닥에 너부러졌다.
스타일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개성이라고는 일도 없는 ‘국민 어린이 단발머리’였다.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아니었다.
정수리부터 내려 빗은 앞머리는 자로 잰 듯 똑바로, 뒷머리는 중간쯤 치켜 올라가게 자른 다음,
뒤통수부터 목까지는 면도로 미는 모양이었다.
면도거품 냄새가 물씬 나는 뒤통수에 손을 대보니 면도로 민 머리가 따끔따끔 만져졌다.
동글동글하던 나의 뒤통수는 우리 집 뒷동산의 움푹 파인 바위 그늘처럼 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머리는 제멋대로 이리 까지고 저리 까져 있었다.
아무리 물을 적셔 손질을 해봐도 단정하기는 애 저녁에 글렀다.
아버지의 손길이 아쉽기는 했지만,
머리가 가볍고 이가 없어졌으니 긴 머리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머리를 길러본 적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