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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Jun 16. 2020

산소벌퉁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 물 들어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라는 노래의 첫 소절이다.

첫 가사를 들으면 동네 얘들과 뛰어놀던 고향의 '산소벌퉁이'가 생각이 난다. 누구의 산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산소의 띠가 벗겨져 벌거숭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산소벌퉁이라 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산소벌퉁이에 올라가면 아랫 벌판 마을, 개울 건너 삼각골, 간댓(가운데) 마을, 동구 밖 입구까지 다 보였다. 산소벌퉁이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빠알간 노을이 산소를 덮을 때면 우리 집 싸리문까지 늘어진 내 그림자를 깔고 눕고 싶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이 집 저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 하나 둘 뿔뿔이 제 집으로 돌아간다. 어떤 엄마들은 저녁 먹으라고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식구들과 밥 먹다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장난 삼아 내가 ‘네에!’라고 대신 대답하기도 한다. 그럴라치면 아버지의 꾸중을 듣는다. 그런데도 자꾸 대답하고 싶어 진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산소벌퉁이 모여 쥐불놀이를 한다. 산소벌퉁이에서 보는 보름달은 정말 크고 밝았다. 나이 수대로 묶은 짚을 휘이~휘이~ 돌리면서 달님에게 복을 빈다. 산소벌퉁이는 내 인생의 양탄자 같은 곳이었다.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8살짜리 맏딸인 나의 등에는 언제나 일곱 살 차이 젖먹이 막내 동생이 업혀 있었다. 동네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를 하면 깍두기(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런 신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깍두기라도 시켜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다방구(술래잡기 놀이의 하나)를 하는 날이면 노는 것만 멍하니 부럽게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게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가 너무 커서 걷기도 불편했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애들이 노는 걸 그냥 보고만 있자니 너무 놀고 싶었다.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8살짜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우리 집과 산소벌퉁이 사이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밤나무 그늘 밑에 멍석을 깔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기에 그만이었다. 반면에 엄지 손가락만 한 송충이의 극성 또한 대단했다. 그 날은 늦가을이었으니 밤 딴 지 오래되었고 송충이도 없었다.


그 밤나무에 아기를 포대기로 업혀 놓았다.

(밤나무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새로)

다행히 포대기가 커서 안전하게 묶어 놓을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젖먹이 아기는 잠시 업혀 있더니 느낌이 아닌가 싶었는지 이내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산소벌퉁이로 달려갔다.


다방구 놀이에 흠뻑 빠져 신나게 놀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나의 머릿속에 밤나무에 업혀두었던 아기는 흔적 없이 지워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엌에서 천둥소리 같은 욕설과 함께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고 냅다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빼게 상책이었다. 산소벌퉁이를 넘어 동구 밖으로 내달렸다.     


(내 생각에...)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느긋하게 빨래 함지박을 이고 집으로 오던 엄마의 귀에 익숙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이년이 왜 애를 울려?”하며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게 웬일인가? 막내둥이 아기가 밤나무에 묶여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이년! 들어오기만 해 봐라,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테니!”

라고 했을 것이다.    


동구밖에 가면

늘 상 나에게 ‘소도’ 같은 존재가 있었다. 아버지다. 동구 밖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다 보면, 언제나 어느 집에선가 막걸리를 드시는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날도 얼굴이 벌게진 아버지를 발견했다.

먼저 나를 본 동네 아저씨가     

“똘똘이 왔구나! 오늘은 또 뭔 일로 왔냐?”라고 한다.

    

막걸리 술판이 언제 끝날지는 기약이 없다.

어차피 아버지나 나나 엄마의 공공의 적이었으니, 배짱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신나게 논 뒤 끝이라 안주를 얻어먹고는 이내 아버지의 무릎에서 잠이 든다.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잠든 딸내미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동구 밖을 벗어나 오르막 산소벌퉁이를 향해 걷는다.

다음 날도 산소벌퉁이는 하얀 햇살 가득 품고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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