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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Oct 28. 2020

후배


올 가을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세월을 어찌 여행해 왔는지, 만나서 그 여정을 듣고 싶다.


젊은 시절, 대학 다니는 동안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물론 성적이 좋아서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절실했던 사실은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다행히도 내가 다닌 대학은 등록금도 저렴했을 뿐 아니라 장학제도도 잘 갖추어진 학교였다. 덕분에 무사히 4년을 마치고 졸업했다.

학점이 저조하여 장학금을 받지 못할까 봐 나의 대학생활은 매 학기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등록을 하지 못하면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벌어서 학비를 마련해야 하니, 그저 장학금 받기 위한 학점관리가 우선이었다.

나의 사정을 모르는 학우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점관리 잘하는 욕심 많은 학우로 인식했을 것이다.  


장학금을 받지 못해 등록을 못할 뻔했던 학기가 있었다. 학점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시험지 뒷면에도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쓰지 못하는 바람에 그 과목이 D학점이 나왔던 것이다.

아무리 다른 과목을 잘하였다 하더라도 장학생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 학기 등록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매일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딱히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는 정도의 아르바이트 자리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추가 등록기간이 다가왔다. 결국 휴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마지막으로 입이 떼어지지 않았지만 엄마한테 부탁해 보기로 하고 말했지만 무산되었다.

빠듯한 엄마의 살림살이 재정에 나의 등록금이 자리할 리가 없었다.

결국 울며불며 싸우다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뚱뚱 부은 눈을 하고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일찌감치 학교로 갔다.     

짙은 초록빛의 교정은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머금어 차분했다. 나는 늘 앉던 단과대 도서관 자리 책상에 엎드려 고단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대나무대로 만든 하늘색 비닐우산을 들고 허름한 차림으로 서 계셨다.

교문부터 〇〇과 〇〇〇을 찾아왔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만나는 학생마다 물어물어 내가 앉은 도서관 자리까지 찾아오셨던 것이다.     

이슬비를 맞은 가난한 나의 아버지의 눈은 슬퍼 보였다.

열네 살 때, 소사에서 나를 데리러 오시던 날의 애처로워하던 눈이었다.

아버지의 눈을 보니, 부은 나의 눈에 또 눈물이 가득해졌다.

아버지와 나는 한동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물끄러미 비 오는 캠퍼스를 바라보며 건물 현관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비 오는 날 학교로 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상황과 슬 마음은 따스함으로 채워지고도 남았다.    


한 후배가 그런 부녀지간의 모습을 멀찌감치 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운 좋게 후배를 만나 친절한 안내로 나를 찾아내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천 원짜리 몇 장을 바지춤에서 꺼내시더니 고마운 후배와 점심을 먹으라고 건네시고는 축 늘어진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비닐우산을 쓰고 이슬비 속으로 걸어가셨다.     


다음 날, 공부하던 전공 책이 이상하게 불룩했다.

“이게 뭐지?”

하고 열어보니 돈 봉투였다. 돈 봉투 겉에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등록하세요. 절대로 부담가지시면 안 됩니다. 갚으면 되니까... 갚으면 되니까...”

라고 쓰여 있었다. 돈 봉투의 출처는 아버지를 나에게 안내했던 그 후배였다.

대출을 알아보려 도서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후배가 다녀갔던 것이다.     

후배는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나도 3년이 늦었지만 그는 나보다도 더 늦은 만학도였다. 우리들은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가끔 캠퍼스에서 만나면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나누며 잡담을 나누곤 했다.

어느 날, 궁금해서 느지막이 대학에 온 사정에 대하여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오고 싶어서”

라는 말밖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종로에 있는 빌딩에서 야간 경비를 서는 일을 하며 학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후배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사정을 나의 아버지로부터 들어 처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나의 형편에 대하여 그 누구에게도 말한 바가 없었다.

그저 집에서 해주는 밥 먹으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쪽지에

“갚으면 되니까”

라는 말을 연거푸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졸업 후 10년 후에 갚으면 되는 대여장학금으로 그 학기의 등록을 할 수가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등록금의 가치 이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후배의 무한한 배려를 마음 깊숙이 간직하며 살았다.

그리고 여유 없이 살던 나는,

배려의 마음과 그리 사는 법을 배웠다.

그는 나를 잘 자라게 했다.    


지난해 또 해가 넘어갈 무렵, 그 후배와 연락이 닿아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첫마디가 30여 년 전의 목소리와 똑같아서 바로 알았다고 했다.

나 역시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어찌 목소리를 잊을 수가 있는가!

그가 남겼던 메모도 목소리로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무원 퇴직하고 사는 동네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지입차를 운행한다고 했다.

너무나도 반갑게 나의 고향 지역에서 산다고 했다.

그는 졸업 후 공무원이 되었고 나의 대학 동기와 혼인을 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그의 첫 아이 장례식장에서였다.

나는... 차마...

부부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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