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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미숙 Nov 01. 2020

가출

1974

부부싸움을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한밤중에 종종 집을 나가셨다.

시골에 살 때는 이웃 친척집으로, 가까운 친구 집으로 단기 가출을 하셨다.

그럴라치면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를 찾아 나서곤 하셨다.

우리는 종종 있는 일이라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는 부부싸움을 해도 가출은 하지 않으시는 듯했다.

그렇다고 부부싸움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그날도 한밤중에 싸움을 하시더니 잠자는 자식들을 깨웠다.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아마도 편을 나누어 갈라서자고 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다. 얼른 옷을 주워 입었다.

동생들에게도 옷을 입히고 한여름 밤에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다섯 살 막내 동생은 아버지가 포대기로 업었다. 오빠는 따라나서지 않고 어머니와 남았다. 
아버지는 메아리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외침을 뒤로하고 우리를 리어카에 싣고 어디론가 어둠과 새벽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빈 아스팔트 길에 띄엄띄엄 늘어선 가로등 불이 변주곡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큰소리치고 가출한 아버지는 아이 셋을 이끌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를 가든 변주곡 안에 갇혀 있다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얼마만큼 가니, 방범대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중랑천 끝자락에 다리(성동교) 하나가 있었는데, 그 다리 초입새에 자그마한 파출소가 하나 있었다.

불 켜진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 불빛을 향하고 있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파출소 안에는 통금을 위반해 붙잡혀 온 술 취한 아저씨들이 서너 명 있었고 순경 아저씨와 방범대원들이 파출소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뒤에도 방범대원들에게 이끌려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될 무렵까지 파출소 안은 북적거렸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파출소를 나갔다. 

파출소 안에 있는 동안, 사람들의 눈길이 우리에게  모아졌다.

"웬 아이 아버지가 고만고만한 딸내미들과 한밤중에 가출이라니?"

사연이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동생들을 파출소 벤치 구석에 바짝 붙여서 앉히고는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갖가지 모습들의 아저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아저씨들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사연을 듣고 있었다.

"마누라와는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라고 했을 법한, 아버지의 사연을 들어서인지 딱한 듯 여기저기서 쯧쯧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경과 방범대원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동생들은 동정받아 마땅한 아이들이 되었다.

이윽고 어떤 아저씨가 우리 셋을 향해 오더니 백 원짜리 지폐를 건네는 것이었다.

또 한 아저씨도, 또 한 아저씨도... 순경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차비를 주었다. 


동정의 손길로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날이 밝았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우리의 리어카는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버스를 탈 작정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양대학교 정문 앞이었다.

난생처음 높은 빌딩을 구경했다.

한양대학교에서 왕십리 사이의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그 길에 행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장사를 했다.

우리는 잔뜩 부푼 막걸리 빵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제야 나는,

“아부지 우리 어디가?”

라고 물었다. 

“으응 마포 큰 집으로 갈 거야, 버스 한 번만 타면 돼, 조금만 참아!” 
그리고는 나보고 동생 챙기며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리어카를 어딘가에 맡겨놓고 오셨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마포 큰 집으로 향했다. 


밤새 여정에 지친 나와 동생들은 잠이 들었다.

잠결에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잠자는 척하며 실눈을 뜨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어머니도 잠을 못 주무셨나 보다. 허기가 지신 모양이다. 어머니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더 많은 기미가 밤새 검게 올라와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며칠만 봐달라고 큰어머니께 맡겨 놓고는 장사한다고 나가셨단다.

새벽 버스를 타고 온 어머니가 밖에서 아버지가 없는 틈을 보다가 우리를 데리고 갈 작정이었던 거다.

큰 어머니의 근심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머니를 따라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 나는 부쩍 자라 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집에서 하냥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훗날 교과서에서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을 보고,

“우리 엄마 아부지도 그렇게 살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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