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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Oct 21. 2024

Ep5| 군대에서 JLPT1급을 따기까지

나를 바꾼 일본배낭여행



일본어 선생님이 되는 최선의 루트였던 교직 이수에 실패를 했다. 대관령을 타고 내려오는 강원도의 겨울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섭게 피부에 내리 꽂혔다. 밀려오는 상실감을 달랠 길이 달리 없었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우체통에 반갑지 않은 우편물이 도착했다. ‘입영통지서’였다. 대학교 2학년 마치고 가리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겁이 났다.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통지서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보였다. ‘상근예비역’이라는 문구였다.


상근예비역은 현역병으로 입영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집에서 출퇴근하는 군인이다. 당시 살던 지역은 상근예비역이 많았다. 일과를 끝마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희망회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상근 기간 동안 공부해서 일어교육과에 편입하자!‘


얼마간 멈추어 있었던 가슴이 다시 뛰는 기분이었다. 편입하려면 영어공부를 해야 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못할 것도 아니었다. 서둘러 편입공부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수없이 많은 수기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상근 입대 반대였다. 무조건 현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절대 안 된다 했다. 이유인즉, 당시 지역 내 상근들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많이 일으켰었다. 저녁에 시내만 나가도 퇴근한 상근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도매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거래처에 갈 때면 그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으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여러차례 2년동안의 목표를 말씀드렸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설득은 되지 않았고 입영일자는 점점 다가왔다. 방황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지난가을 학과 일본어 변론대회에서 수상하여 일본배낭여행 지원금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금액은 50만 원 남짓. 당시 엔/원 환율이 800원대였기에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부산-오사카행 페리를 타고 4박 5일 여정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오가는 2박은 배에서 보내야 했기에 3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다. 작은 배낭가방 하나에 미리 프린트해둔 지도를 들고 낮에는 교토, 고베, 나라를 저녁에는 오사카를 돌아다녔다. 


4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적어도 여행에 필요한 일본어 정도는 가능했다는 점이다. 간판에 적힌 한자들도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고 식당 주문도 어렵지 않았다.


“라멘 히토츠또 나마비루 쿠다사이(라면 하나랑 생맥주 주세요. ラーメン一つと生ビールください。)”

“하이! 카시코마리마시타 (네, 알겠습니다. はい!かしこまりました。)”


손짓, 발짓으로 하던 예전과는 달리 말이 통했다. 지난 1년 동안 전공 공부한 게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역시 외국어는 많이 읽고 말해야 느는가 보다. 아직 배우지 못한 표현들이 많아 말문이 여러 번 막히기는 했지만 여행에는 큰 무리 없었다.


숙소는 오사카 주택가의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그때 같은 방에 묵던 30대 후반 형님이 있었다. 매일같이 배낭 한가득 무언가를 잔뜩 사 왔다.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소호무역, 소위 보따리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일본에 왔다 갔다 한다고.


이때 처음 진로에 미세한 지각변동이 찾아왔다. 일본어 선생님 한 길만 보고 왔지만 거기에 꼭 국한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여행에만 집중했다. 배낭여행동안 친절히 길을 안내해 주는 행인을 만날 수 있었고 교토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돌 정원으로 유명한 료안지(龍安寺)의 툇마루에 앉아서는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다.


‘그래, 꼭 선생님이 될 필요가 있을까? 일본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어든 재밌을 거 같다! 그전에 군대부터 다녀오자.’


많은 생각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현역 입대를 위해 병무청 조언에 따라 거주지를 옮겼다. 희망병과 입대일정이 늦은 봄 이후에나 있어 휴학이 아닌 3학년 1학기 재학을 선택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전공 공부에 매진했고 평균 A학점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나라의 부름을 받아 306 보충대를 통해 일반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배낭여행 때 많은 생각을 했던 료안지에서


군인도 JLPT 1급 딸 수 있다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자대배치를 받은 경기도 안양 소재 부대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훈련소에서는 위대해 보이던 이등병이었지만 자대에서는 (당연히) 가장 말단이었다. 일병, 상병, 병장까지 한 내무반에서 뒤엉켜 지내고 있었다. 동갑내기들은 대부분 상병장급이었고 한 달 먼저 입대한 맞선임은 2살이나 어렸다.


군대 안에서는 걸레 빠는 것 하나에도 규칙이 있었다. 물을 짜는 정도, 바닥 물기 상태, 건조 방법, 걸레 준비 시간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배우고 외우고 몸에 익혀야 했다. 군 문화가 많이 달라져 일과시간 이후로 자유롭게 취미생활이나 공부를 해도 된다고 들었지만 이등병에게는 어림없었다. 혼자서 행동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도 않았고 업무 익히고 생활 규칙, 수십 명이나 되는 중대선임들, 간부님들 얼굴과 이름, 계급, 총번호까지 모든 것을 외워야 했다. 일본어는 무슨.


꼬인 군번이라고 했던가, 내 앞으로 5개월 연달아 선임이 있었고 개중 가장 나이 많은 내가 막내였다. 일꺽(일병 중반)이 지나고 나서 간신히 신병들이 들어왔다. 제 아무리 하버드생이어도 머리 깎아 놓은 이등병은 똑같다. 후임들에게 걸레 빠는 법부터 생활관 수칙까지 매일 같이 가르쳤지만 매번 틀렸다. 몇 번을 설명해도 못 알아 들었고 그들이 실수할 때마다 선임들한테 함께 깨졌다. (나도 똑같았었지…)


그래도 후임이 들어오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군대에서 취침(소등) 시간 이후에 상관 허가하에 지정장소에서 개인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을 연등이라고 한다. 조금씩 연등시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을 읽었다. 권장도서 같은 것들이 부대마다 배급되었는데 꽤나 읽을 만한 책들이 많았다. 그중 자기계발 관련된 책을 주로 읽었다. 군 제대 이후 방향에 대해서도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연등에 차츰 익숙해져 가면서 그동안 손 놓고 있던 일본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당시 부대내에서 자격증 취득을 권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JLPT 1급(N급수 변경 전)을 따기로 마음 먹었다. 12월 초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반년. 주말 외출 때 서점에서 ‘JLPT 1급 한 권으로 끝내기’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을 구매해 왔다. 평일 연등시간과 주말 개인정비(자유) 시간을 이용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JLPT 1급은 고도의 문법ㆍ한자(2,000자 정도)ㆍ어휘(10,000어 정도)를 습득하여 사회생활이 가능한 정도와 대학에서 학습, 연구가 가능한 종합된 일본어 능력 (일본어를 900시간 정도 학습한 수준)이라고 설명하지만 주눅 들 필요 없다. 커트라인만 넘기면 된다. 거기에 2급 내용도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대학 2학년말에 JLPT2급을 취득했기에 조금은 출발이 수월했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였지만 다행히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손에 샤프를 쥐어들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얀 백지에 한자 단어들을 빼곡히 써나갔다. 이미 굳은살이 박힐 대로 박힌 오른쪽 중지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거기에 중급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접했던 단어나 문형들도 많이 등장했다. 문자, 어휘파트는 엉덩이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독해는 이미 강독(READING) 수업을 통해 원서 읽는 연습을 1년 넘게 해 왔기에 무섭지 않았다. 문제를 먼저 읽고 본문을 빠르게 스캔하면서 정답을 찾아내면 된다. 중간, 중간 모르는 단어가 있어 헛다리를 짚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자를 보고 대략 유추할 수는 있었다.


마지막 청해, 리스닝의 경우 반입허가를 받은 CD플레이어를 통해 들어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과목들보다 자신이 없기는 했다. 오랫동안 일드나 애니를 보기도 했고 전공 수업 중 리스닝도 있었지만 소위 귀가 트이는 경험은 아직 해보지 못했었다. 사회였다면 하루 종일 귀에 꽂을 수라도 있지만 군대에서 가능할 리 없었다. 그래서 평일에는 스크립트를 들추어보며 표현을 익혔고 주말에 집중해서 음성파일을 들으며 감각을 익혔다.


어느덧 상병이 되었고 12월이 밝았다. 시험 당일에 외출을 신청해 두었다. 시험장은 안양 시내에 있는 학교였는데 부대에서 다소 시간이 걸려 시험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감사하게도 이날 일정에 대해서 알고 있던 소대장님이 비번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부대로 나와 차량으로 데려다 주었다. 덕분에 무사히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시험장에 착석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하고 말겠다 다짐했다. 어느덧 시험 감독관이 들어왔고 문제지를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시험 시작. 문자/어휘 초반 문제들은 비교적 평이한 문제들이어서 금세 해결하고 넘어갔다. 중간부터는 긴가민가 한 문제들이 나왔다. 고민이 되는 문제들은 일단 체크만 한 뒤 넘어갔다. 시간안배를 위해서다. 문제를 다 풀고 난 뒤 헷갈리는 문제를 다시금 체크했다. 다시 봐도 모르겠는 건 어쩔 수 없다. 운에 맡겨야지.


다음으로 청해. ‘텐키가 이이카라 산뽀시마쇼(날씨가 좋으니 산책합시다.天気がいいから、散歩しましょう。)’라는 방송 조정음이 들려 나온다. JLPT를 공부해 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멘트다. 음성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문제를 읽어둔다. 음성이 흘러가는 동안 정답이 보이면 재빨리 체크한다. 놓친 부분은 들었던 내용들을 바탕으로 유추해서 정답을 찾아본다. 스크립트로 익혔던 표현들이 들리는가 하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 것들도 등장했다. 듣기 평가는 지나가면 다시 풀 수가 없다.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마지막 독해. 전공 강독 수업에서 원서 읽는 연습을 했던 터라 지문 읽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를 먼저 읽고 본문에서 재빨리 포인트를 찾아 내용을 추론한 뒤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체크했다. 비교적 짧은 문장은 여러 번 읽어서라도 답을 찾아낼 수 있지만 긴 문장은 두, 세 번 읽을 시간이 없다. 만점이 아니라 합격(정답률 70% 이상)이 목표다.


정신없이 정답을 체크하고 나니 시험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학교 다닐 때는 시험 끝나고 선후배들과 다 같이 피자를 먹었지만 이날은 소대장님과 식사를 하고 다시 부대에 복귀했다. 시험을 마쳤다는 안도감도 잠시, 다시금 군인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시험결과 발표가 되었다. 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수험번호 000 김형민, 300점대로 2009년 JLPT 1급 합격. 군 생활 중 이룬 가장 큰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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