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재의 노랫말 같이 ‘반짝 빛나던’ 나의 2006년. 대학교에 진학했고 잠시간 부적응기가 있었지만 금세 적응 했고 성적표에는 A학점이 가득했다. 그리고 원하던 전공인 일본학과에도 선발되었다. 일본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 중에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空飛ぶ鳥も落とす)는 말이 있다. 기세등등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 정도 기세라면 태양도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어 선생님’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전공수업을 들었다. 일본어과나 일문과와는 달리 일본 사회, 경제, 정치에 대한 수업 비중이 많은 전공이었다. 그래서 관심분야인 일본어와 일부 일본사회 과목을 중심으로 학점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문법, 독해, 회화, 작문까지. 매일같이 일본어에 파묻혀 지냈다. 고등학교 때는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으면 선생님들이 수능공부나 더 하라며 핀잔을 주고는 했다. 이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만큼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3번째 학기였지만 학과에서는 신입생과 마찬가지였기에 전공 기초 일본어 1부터 시작했다. 교재도 동일한 분카 일본어. 이미 A+를 받았던 과목에 동일한 텍스트를 사용하니 공부가 쉬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학제 개편으로 인해 1학년 후배들은 학과제로 입학했다는 점이다. 이미 JLPT 2급이나 JPT 600점 이상 등 일본어 중수 또는 고수들이 있었다. 나는 아직 일본어 공인 성적표가 없던 때였다. 학점도 상대평가. 기초라고 방심할 수 없었다.
수업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독해수업인 일본어 강독. 일본어로 된 원서 내용을 읽고 해석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기초 일본어와 달리 한자나 어려운 문법이 많이 등장했다. 내가 사랑하던 히라가나는 어디로 갔는지 조사 가(が), 와(は)나 조동사 데스(です)나 마스(ます)를 제외하면 온통 한자 천지였다.
自由が丘の駅で、大井町線から降りると、ママは、トットちゃんの手を引っ張って、改札口を出ようとした。
실제로 일본어 강독 수업 텍스트 중 일부로 쓰였던 창가의 토토(窓際のトットちゃん) 한 구절이다. 지금이야 이건 역이름이고, 노선이름이자 지역명이며, 명사고 동사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기초일본어 A+ 학점이라고 으스대던 일본어 초급자에게는 새로운 외국어를 접하는 것과 같았다.
교수님이 매 수업시간마다 무작위로 학생을 지목해 문장을 읽게 하고 해석을 시킨다. 그리고 중요단어는 쪽지시험을 친다. 3학점짜리 수업이었지만 이 3시간 수업을 위해 일주일을 다 쏟아부었다. 우리 과는 인문대 내에서 공부 많이 하기로(시키기로) 소문이 나있다고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고는 했는데 사실이었다. 매일 늦은 밤까지 인문대 건물 4층, 일본학과 세미나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독수업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지금까지와는 달리 선후배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꼭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배겼고 엄지 손가락도 감각이 무뎌졌다. 쪽지시험의 공포는 문법, 회화, 한자 수업으로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쪽지시험이나 깜지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보다 더 많아졌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는 시간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지금처럼 공부했다면 서울대도 가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역시 교양과 전공은 달랐다. 일본어 문법은 일본에서 일본어학을 전공한 교수님이 맡았다. 교재도 일본원서라서 문법보다도 일본어 해석이 걸림돌이 되었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사역표현과 존경어. 그중에서도 사역 수동형이라 일컬어지는 させられる는 한국어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표현방식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함을 당하다.’
당한 거면 당한 거지 무얼 그리 돌려서 표현하는지. 에둘러서 표현한다는 일본(어)에 잘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내가 술을 마셨다’는 飲む(노무)지만 마시고 싶어서 마신 게 아니고 ‘남이 시켜서 억지로 마셨다. (마심을 당했다)’는 飲まさせられる(노마사세라레루)또는 축약형인 飲ませる(노마세루).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라 예문을 여러 번 보고 읽어서 그 ‘억울함’을 입에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존경어도 단순히 입니다, 합니다 급인 です(데스)、ます(마스)로 끝나지 않았다. 우선 낯설기만 한 겸양어의 존재. 나를 낮춤으로써 상대방을 높이는 방식이다. 접두어 お에 する나 いたす를 붙이는 조합형이 있는가 하면 申す、拝見する처럼 외워야 하는 것도 있다. 더욱 머리 아픈 건 존경어의 いらっしゃる(이랏샤루). 있다(いる), 가다(行く), 오다(来る) 3가지 모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회화수업은 매시간마다 교재에 나오는 스크립트를 가지고 롤플레이를 했다. 그래서 입이 닳도록 모든 스크립트를 달달 외워야 했고 한자수업은 일본교육한자 1006자를 익히는, 아니 깜지 쓰고 쪽지시험 보는 시간이었다. 여기에 일본어 원어연극제 배우로도 참가했으니 살인적인 스케줄과 공부량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일본어 홍수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교육학 수업이었다. 교직을 위해 교육학개론을 시작으로 교육심리, 교육사회, 교육철학 등을 필수로 이수해야 했다.
교육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어떤 이론들이 있었는지를 배웠다. ‘잘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학문으로서의 교육을 배운 것이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직 수업을 들으면 신이 날 줄 알았지만 어딘가 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게 임용고시다. 유아교육과를 제외하고 사범대가 전무한 학교여서 임용고시 합격 플래카드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학과 선배 중에도 임용고시 공부를 하는 경우들이 있었지만 몇 년째 고배를 마시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 교사 T.O는 강원도만 해도 1~2명이었고 어떤 해는 없는 경우도 있었다. ‘교직 이수=일본어 선생님’ 등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하루는 학년 지도 교수님과 진로 면담이 있었다. 이분은 대학 전공이 일어교육이었다. 크게 벗어난 건 아니지만 왜 중등교사가 아닌 교수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가르치는 일이 2할이면 행정업무가 8할이었지.”
당시 교육과정으로 인한 것인지, 비주류 과목이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중등학교 시절 선생님들 모습이 생각났다. 교무실에 이따금 가면 대개들 모니터 화면에 아래아한글(워드 프로세서)이 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종례시간이면 들고 오던 가정통신문도 그들의 작업물이었다.
연구와 교육(강의)이 4:6 정도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좋다던 교수님. 그의 말에 흔들렸던 것이었는지 대학원 진학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꼭 중등학교 교사일 필요는 없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전공 일본어 수업 강행군과 교직수업을 이수해 나갔다. 교직수업은 나를 제외하고 5명 정도가 더 수강했다. 과에 할당된 교직정원은 3명. 전공 외 수업에서 과 동기를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경쟁자였다. 질 수 없었다.
이윽고 2학기 기말고사까지 마무리되었다. 2학년 최종 학점은 평균 3.8 정도. 기대보다 높지 못했지만 교직이수 희망 그룹 가운데 3위. 이대로면 적어도 교원자격은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학교통폐합이었다.
당시 전국 지방국공립 대학교는 통폐합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원도내에도 크고 작은 국립대들이 여럿 있었고 재학 중이던 학교도 한 대학과 통합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학과 입학 정원을 30명대에서 28명 정도로 줄이는 것으로 결정 났다. 교직이수는 정원의 10%, 즉 2.8명이 된다는 계산이다. 학교본부에서 정원이 줄어드니 교직을 2명까지 밖에 내줄 수 없다는 통보가 왔던 모양이었다.
2017년 겨울이 찾아왔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왔다. 손에서 핸드폰을 놓을 수 없었다. 교수님이 학교본부에 교직정원 3명을 승인해 달라고 하셨던 모양이었다. 대학승인이 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던 조교 선생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밖에 해가 떴는지 눈이 오는지 추운지 더운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1주일, 2주일이 흘렀다.
“미안하게 됐다…”
교직이수 실패를 알리는 연락이었다. 그 순간 일본에 홈스테이 갔던 4년 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이후 일본어 선생님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다. 한 번도 손에서 놓아 본 적 없던 꿈이 터지는 비눗방울처럼 사라져 버렸다.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다시 수능을 봐야 할까, 아니면 교육대학원을 가야 할까. 반짝 빛나던 2006년을 지나 한 없이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2007년을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