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시는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시(鳥取県米子市)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홈스테이 출발 첫날, 단체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문화체험을 위해 오사카에 들러 오사카성을 둘러보고 요나고시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버스로는 약 4시간에 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풍경들이 신기할 법도 했지만 30도를 넘는 폭염과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는 낡은 버스 탓에 땀범벅이 되어 거의 실신상태였다.
어느덧 도심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고즈넉한 바다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한 곳은 동해바다와 인접해 있는 사카이 미나토(境港)였다. 이 지역 출신인 일본 만화작가 미즈키시게루의 이름을 딴 거리(水木しげるロード)에 들러 기념사진촬영을 했다. 일본 대표 호러만화인 게게게노 키타로(ゲゲゲの鬼太郎) 캐릭터들이 거리 곳곳에 등장한다. 만화(2차원)와 현재(3차원)가 공존하는 세상. 이곳이 일본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이후 요나고시 시청(米子市役所)으로 향했다. 내부에 자리 잡은 홀에는 한국 홈스테이단을 맞이할 일본참가단이 나와 있었다.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한 일본 아이들과 그의 부모님들이었다. 간단한 환영식 겸 오리엔테이션을 한 후 하나, 둘 매칭된 가족들과 떠났다. 그나저나 나(와 같은 반 친구)를 맞이할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에게 오셨다. 살짝 파마를 한 듯한 단발머리에 150cm 즈음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 꼭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일본어 선생님이 오셔서 간단히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이미 가족 모집 T.O가 찬 이후라 급하게 추가 가정을 모집했고 이 분이 우리를 받아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 또래는 없고 남편과 성인이 된 두 딸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마티즈처럼 보이는 작은 일본 경차에 캐리어를 싣고 아주머니 집으로 향했다. 논밭이 보이는 길을 지나 꼭 짱구는 못 말려에서 본 듯한 이층집 단독 주택에 도착했다.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두 딸의 엄마인 큰 딸 부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누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저녁으로는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진하고 맛있었다. 밥도 듬뿍 담아 주었다. 카레를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또 있었을까. 일본어 시험 100점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일본어라고는 하지메마시테(처음 뵙겠습니다), 아리가토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정도가 전부였다. 알고 있는 일본어를 총동원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샤워까지 마치고 긴장이 풀어졌는지 잠자리가 준비된 타타미 방에 눕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다음날이 밝았다. 평소와 다른 방안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이곳이 일본임을 자각했다. 둘째 날은 홈스테이단 단체관광 일정이었다. 한일우호교류공원 바람의 언덕 (日韓友好交流公園「風の丘」), 전통사찰, 대형마트 쟈스코(현재의 이온몰)등 주요 관광지와 상업시설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속초에 이마트도 생기기 전이었기에 같은 바다 도시임에도 정갈하고 더욱 발전한 듯한 모습에 어딘가 모르게 매료되었다.
셋째 날은 자유일정. 우리 가정과 인근에 있던 다른 가정이 한 팀이 되어 움직였다. 오전에 찾아간 곳은 호우키코다이 언덕 공원(伯耆古代の丘公園). 고분군이 있는 공원이다. 아주머니 차를 타고 목적지 인근에 도착해 주차 후 도보로 이동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도 길이 낯선지 한참 헤매기 시작했다. 아직 스마트폰이 있기 전이라 지도를 프린트해서 온 상황.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중 때마침 길을 지나가는 행인을 발견했다. ‘스미마셍’이라고 운을 띄운 후 자초지종을 설명한 아주머니. 그 말을 듣고는 본인도 그쪽으로 지나가는 길이라며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대화 내용은 어디까지나 내 추정이다). 대략 3분 넘게 걸었을까 목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분은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고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일본사람의 친절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무사히 공원을 둘러보고 근처 유도관에서 유도 체험을 했다. 저녁이 되어서는 집 근처 공원에서 마을 사람들과 모여 바비큐 파티를 했다. 비슷한 또래 친구들도 제법 모였고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풋살을 즐겼다. 운동에는 영소질이 없어 '공'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얼굴이 터질 만큼 달렸고 신나게 공을 찼다. 이만한 한일교류가 또 있을까.
어느덧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고기와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 아무 옆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이 통할리 만무했지만 알고 있는 일본어, 영어 단어, 그리고 바디랭귀지로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함께 사진도 찍고 메일 주소도 교환했다. 길 줄만 알았던 3박의 일정은 마치 3초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덧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아침이 밝았다. 그새 정이 들었던지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코 끝이 찡해져 왔다. 마지막으로 집 앞마당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가슴속에 묘한 고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이성을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 증상은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쉽사리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진로상담시간이었다. 인문고 이과반이었던 나는 돌연 문과로 전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히 담임 선생님은 반대했다. 대부분의 이과 선생님들도 반대했다. 그러나 고집을 굽힐 수 없었다. 인생 처음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원하던 대로 문과 3학년 생이 되었다.
‘꿈을 가르치는 일본어 선생님!’
인생 처음 비전(VISION)이 생겼다. 일본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하고 싶어졌다. 고동의 이유를 찾은 것이다. 아직 고동조차 느끼지 못한 후배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선생님이 되리라!
수능까지 남은 시간은 단 1년. 일어교육과에 진학해 일본어 선생님이 되는 것, 그것만이 내가 꿈꾸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