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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Nov 03. 2024

Ep7| 일본어 선생님이 될 줄 알았어

매일같이 쏟아지는 일본어 홍수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교육학 수업이었다. 교직을 위해 교육학개론을 시작으로 교육심리, 교육사회, 교육철학 등을 필수로 이수해야 했다.


교육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어떤 이론들이 있었는지를 배웠다. ‘잘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학문으로서의 교육을 배운 것이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직 수업을 들으면 신이 날 줄 알았지만 어딘가 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게 임용고시다. 유아교육과를 제외하고 사범대가 전무한 학교여서 임용고시 합격 플래카드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학과 선배 중에도 임용고시 공부를 하는 경우들이 있었지만 몇 년째 고배를 마시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 교사 T.O는 강원도만 해도 1~2명이었고 어떤 해는 없는 경우도 있었다. ‘교직 이수=일본어 선생님’ 등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하루는 학년 지도 교수님과 진로 면담이 있었다. 이분은 대학 전공이 일어교육이었다. 크게 벗어난 건 아니지만 왜 중등교사가 아닌 교수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가르치는 일이 2할이면 행정업무가 8할이었지.”


당시 교육과정으로 인한 것인지, 비주류 과목이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중등학교 시절 선생님들 모습이 생각났다. 교무실에 이따금 가면 대개들 모니터 화면에 아래아한글(워드 프로세서)이 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종례시간이면 들고 오던 가정통신문도 그들의 작업물이었다.


연구와 교육(강의)이 4:6 정도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좋다던 교수님. 그의 말에 흔들렸던 것이었는지 대학원 진학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꼭 중등학교 교사일 필요는 없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전공 일본어 수업 강행군과 교직수업을 이수해 나갔다. 교직수업은 나를 제외하고 5명 정도가 더 수강했다. 과에 할당된 교직정원은 3명. 전공 외 수업에서 과 동기를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경쟁자였다. 질 수 없었다.


이윽고 2학기 기말고사까지 마무리되었다. 2학년 최종 학점은 평균 3.8 정도. 기대보다 높지 못했지만 교직이수 희망 그룹 가운데 3위. 이대로면 적어도 교원자격은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학교통폐합이었다.


당시 전국 지방국공립 대학교는 통폐합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원도내에도 크고 작은 국립대들이 여럿 있었고 재학 중이던 학교도 한 대학과 통합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학과 입학 정원을 30명대에서 28명 정도로 줄이는 것으로 결정 났다. 교직이수는 정원의 10%, 즉 2.8명이 된다는 계산이다. 학교본부에서 정원이 줄어드니 교직을 2명까지 밖에 내줄 수 없다는 통보가 왔던 모양이었다.


2017년 겨울이 찾아왔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왔다. 손에서 핸드폰을 놓을 수 없었다. 교수님이 학교본부에 교직정원 3명을 승인해 달라고 하셨던 모양이었다. 대학승인이 나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던 조교 선생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밖에 해가 떴는지 눈이 오는지 추운지 더운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1주일, 2주일이 흘렀다.


“미안하게 됐다…”


교직이수 실패를 알리는 연락이었다. 그 순간 일본에 홈스테이 갔던 4년 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이후 일본어 선생님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다. 한 번도 손에서 놓아 본 적 없던 꿈이 터지는 비눗방울처럼 사라져 버렸다.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다시 수능을 봐야 할까, 아니면 교육대학원을 가야 할까. 반짝 빛나던 2006년을 지나 한 없이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2007년을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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