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선생님이 되는 최선의 루트였던 교직 이수에 실패를 했다. 대관령을 타고 내려오는 강원도의 겨울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섭게 피부에 내리 꽂혔다. 밀려오는 상실감을 달랠 길이 달리 없었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우체통에 반갑지 않은 우편물이 도착했다. ‘입영통지서’였다. 대학교 2학년 마치고 가리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겁이 났다.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통지서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보였다. ‘상근예비역’이라는 문구였다.
상근예비역은 현역병으로 입영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집에서 출퇴근하는 군인이다. 당시 살던 지역은 상근예비역이 많았다. 일과를 끝마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희망회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상근 기간 동안 공부해서 일어교육과에 편입하자!‘
얼마간 멈추어 있었던 가슴이 다시 뛰는 기분이었다. 편입하려면 영어공부를 해야 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못할 것도 아니었다. 서둘러 편입공부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수없이 많은 수기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상근 입대 반대였다. 무조건 현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절대 안 된다 했다. 이유인즉, 당시 지역 내 상근들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많이 일으켰었다. 저녁에 시내만 나가도 퇴근한 상근들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도매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은 거래처에 갈 때면 그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으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여러차례 2년동안의 목표를 말씀드렸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설득은 되지 않았고 입영일자는 점점 다가왔다. 방황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지난가을 학과 일본어 변론대회에서 수상하여 일본배낭여행 지원금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금액은 50만 원 남짓. 당시 엔/원 환율이 800원대였기에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부산-오사카행 페리를 타고 4박 5일 여정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오가는 2박은 배에서 보내야 했기에 3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다. 작은 배낭가방 하나에 미리 프린트해둔 지도를 들고 낮에는 교토, 고베, 나라를 저녁에는 오사카를 돌아다녔다.
4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적어도 여행에 필요한 일본어 정도는 가능했다는 점이다. 간판에 적힌 한자들도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고 식당 주문도 어렵지 않았다.
“라멘 히토츠또 나마비루 쿠다사이(라면 하나랑 생맥주 주세요. ラーメン一つと生ビールください。)”
“하이! 카시코마리마시타 (네, 알겠습니다. はい!かしこまりました。)”
손짓, 발짓으로 하던 예전과는 달리 말이 통했다. 지난 1년 동안 전공 공부한 게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역시 외국어는 많이 읽고 말해야 느는가 보다. 아직 배우지 못한 표현들이 많아 말문이 여러 번 막히기는 했지만 여행에는 큰 무리 없었다.
숙소는 오사카 주택가의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그때 같은 방에 묵던 30대 후반 형님이 있었다. 매일같이 배낭 한가득 무언가를 잔뜩 사 왔다.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소호무역, 소위 보따리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일본에 왔다 갔다 한다고.
이때 처음 진로에 미세한 지각변동이 찾아왔다. 일본어 선생님 한 길만 보고 왔지만 거기에 꼭 국한될 필요는 없었다.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여행에만 집중했다. 배낭여행동안 친절히 길을 안내해 주는 행인을 만날 수 있었고 교토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돌 정원으로 유명한 료안지(龍安寺)의 툇마루에 앉아서는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다.
‘그래, 꼭 선생님이 될 필요가 있을까? 일본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어든 재밌을 거 같다! 그전에 군대부터 다녀오자.’
많은 생각을 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현역 입대를 위해 병무청 조언에 따라 거주지를 옮겼다. 희망병과 입대일정이 늦은 봄 이후에나 있어 휴학이 아닌 3학년 1학기 재학을 선택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전공 공부에 매진했고 평균 A학점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나라의 부름을 받아 306 보충대를 통해 일반 현역병으로 입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