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토익점수까지 만들어 반년만에 대졸 신입으로 입사했다. 졸업 유예, 취업 재수가 유행처럼 퍼지던 중이었으니 꼬인 군번에서 풀린 사회 초년생이 된 것이다. 입사 첫날, DMC역에서 입사동기 형과 만나 긴장과 설렘을 함께 나누며 빌딩 숲을 지나 18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도착했다.
인사팀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배속된 해외영업팀으로 이동했다. 이미 업무를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8시 30분이 되어 모두가 출근하였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쳤다. 사무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팀에도 얼굴 도장을 찍었다. 사회 신병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팀 미팅이 진행되었다.
“형민 씨는 미주과 소속이 좋겠어”
해외영업팀은 그 안에서도 미주과와 유라시아과 (기억이 맞다면)로 나뉘었다. 일본 전담팀은 없었다. 묘하게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회사 홈페이지에서도 일본지사의 존재를 확인했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과 상사(사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일본 담당팀은 없는 건가요? 일본지사로 출장도 갈 수 있나요?”
“일본지사는 철수한 지 좀 되었어. 미주과에서 일본 바이어도 관리하고 있어. 나중에 베트남으로도 파견 갈 거야.”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의 산업 발전과 더불어 섬유산업이 대거 해외로 이동해 나갔다. 유니클로 등 일본 섬유기업들 생산기반이 베트남 등 동남아로 이동했고 회사도 그에 발맞추어 베트남 공장과 지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오사카에 있던 일본 사무소는 폐쇄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덤덤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큰 시련은 업무를 배우기 위해 이메일을 열어본 순간부터였다. 온통-! 영.어.였다. 무역서류 확인할 때나 필요할 줄 알았는데 모든 서신왕래가 영어라니. 일본어는 코빼기도 안보였다. 문장들도 토익 때 보던 것과는 달랐다. 다양한 비즈니스 문장과 업계용어가 난무했다. 하필 입사 후 첫 미션도 영어로 바이어에게 회신하는 일이었다.
토익점수만 따면 영어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마지막까지 영어가 발목을 잡는구나. 입에도 안 붙는 ‘엘빈 킴-elvin kim-’이라는 영어 이름까지 만들어 바이어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렸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다나카상, 나카무라상은 메일함 어디에도 없었다. 영어에 대한 부담감과 생전 처음 접하는 섬유 용어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해졌다.
어느 사이 입사한 지 두 달이 되어갔지만 실수가 없는 날이 없었다. 바이어에게 엉뚱한 내용을 회신하는가 하면 원단 샘플을 잘못 보네기도 했다. 매일 같이 혼났고 일 배운다는 핑계로 막차 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하루는 꿈에도 그리던(!) 일본 바이어와의 미팅이 잡혔다.
“하지메마시테, 신진노 키무데스(안녕하세요. 신입 김입니다.)”
사수와 나, 그리고 일본 상사 바이어와 회의실에서 30여분 남짓한 미팅을 가졌다.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던 사수는 바이어와 막힘없이 일본어로 대화했다. 나는 기초 일본어 때부터 뱉어봤던 하지메마시테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둘의 대화내용을 메모하려고 애썼지만 받아 적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팅이 끝나자 사수는 오늘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질문했다. JLPT N1이며 JPT 800점 대니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긴장했던 탓도 컸다. 나름 대학생 때는 일본어 우등생 반열에 속해 있었는데 회사에 오니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그저 바보였다. 그런 놈이 일본 해외영업을 하겠다고 들이댔으니. 사수에게 깨지는 것 이상으로 자존심이 처절하게 박살 났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업무야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만 언어는 다른 문제였다. 더욱이 특기라고 생각했던 일본어는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학연수를 괜히 가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때마침 친하게 지내던 학과 선배형이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길로 워킹홀리데이 대행을 알아보았다.
2013년 3월 1일 입사, 동년 6월 30일 퇴사. 그토록 원했던 해외영업으로 시작한 첫 사회생활을 불과 3달 만에 마무리 지었다.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심지어 돈을 주고 의뢰를 맡긴 일본 워킹홀리데이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나이 (당시 27살)때문인지 입국 진술서 내용이 부적합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불발되었다. 다시 한번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간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회사까지 그만둔 마당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편, 당시 정부에서는 해외 인턴을 장려하던 상황이었다. 취업 준비할 때 일본 해외 인턴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일본 내 생활비를 감당할 수준의 지원금이 나오지 않아 접어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회사도 그만두고 워킹까지 떨어진 마당에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길로 (당시)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모집하는 2013년 하반기 중소기업 해외인턴십에 서류를 제출했다.
해외인턴십은 6개월 과정이며 서류전형, 면접전형, 온/오프 교육 이수, 현지 기업매칭 총 4단계를 걸쳐 최종 선발된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안산에서 합숙교육을 진행하는 동안 도쿄 오다이바(お台場)에 위치한 모 한인기업과 최종 매칭이 되었다. 지낼 곳은 도쿄 고토구(江東区)에 있는 한 셰어하우스로 정했다. 이곳은 일본인 집주인과 스카이프 화상면담으로 입주가 성사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2013년 9월 5일, 바퀴 달린 커다란 이민가방 하나와 사전에 신청해 둔 일본 가라케(피처폰)를 들고 도쿄로 향했다. 졸업여행 이후 2년 만의 일본행이자 첫 도쿄 방문이었다. 온통 일본어로 가득했고 들리는 말도 당연히 일본어였다. 막연히 언젠가는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 입국 후 3박 4일은 정신없이 도쿄 방방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사쿠사, 신주쿠, 시부야, 우에노 등 도쿄의 매력에 흠뻑 취한 관광객모드였다. 이곳에서 앞으로 인턴 6개월 동안 지내게 된다니,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지난 몇 달간의 아픔은 금세 잊혔다. 매일 같이 걸쭉한 라멘을 먹고 시원한 나마(생맥주)를 마셨다.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기록했다.
주말이 지나 첫 출근일 (9월 9일)이 밝았다. 주말에 사둔 도영버스(都営バス) 정기권을 사용해 오다이바까지 이동했다. 한국에서 첫 출근때와 마찬가지로 감색 스츄에 넥타이를 맨 하얀색 셔츠차림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팀을 이끄는 부장님을 포함해 한국인 직원 4명, 일본인 스텝 1명, 그리고 나와 같은 인턴생이 3명 더 있었다. 같은 회사로 파견된 동기생까지 더해지면 인턴만 5명이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한국 중소기업의 일본 진출을 서포트하는 업무였다. 민간 코트라(KOTRA)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본사는 한인타운은 신오쿠보(新大久保)에 위치해 있었고 한인슈퍼와 한인식당 등을 운영 중이었다. 인턴 근무하는 동안 일본 시장조사나 각종 수출상담회 행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회사구조나 업무 특성상 ‘한국어’ 사용 비중이 많았다. 일본어 프리토킹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사무실 밖으로만 나가면 온통 일본어고 일본사람이었다. 업무를 배우기 위해 열어본 이메일에도 일본어가 가득했다. 일본어 말문이 트이는 순간이 곧 오리라!
평일에는 인턴 업무를 수행하고 주말이면 관광객 모드로 바뀌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상을 만끽하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진작 오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매달 6만 엔 이상 하는 방 값에 식비까지 감당하기에는 기관에서 주는 생활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언제나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다. 도쿄에 온 지도 금세 두 달 이상이 지나갔다. 제법 이곳 생활에도 익숙해졌고 업무도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수출 상담회 행사 준비도 한참이었다. 한국 기업과 일본 바이어가 매칭되어 비즈니스 상담을 하는 자리다. 인턴은 주로 바이어가 상담 스케줄에 맞게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노무라상, 상담시간이 되었습니다. 3번 테이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미리 머릿속에 외워둔 문장으로 일본인 바이어에게 말을 걸었다. 어려운 문장이 아니니 금세 말이 통했다. 보통은 알겠습니다(와카리마시타)로 답변이 돌아온다. 하지만 간혹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요청이 오는 경우가 있었다. 급한 전화가 있어 시간을 5분만 늦출 수가 있냐는 경우가 그러하다. 아직 머릿속에 충분히 레퍼토리가 정리되기 전이었다. 일본어 회로도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전환이 필요한 때였다. 단순한 몇 마디 조차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첫 회사에서 일본 바이어 미팅이 있던, 그날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에 왔다는 기쁨에만 취해 있었고 이곳에 온 이유를 잊었던 것이다. 아차 싶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일본까지 갔다 와서도 (심지어 전공까지 하고) 일본어도 못하는 진짜 바보가 되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게든 일본어를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됐다. 적어도 일본어로 말문을 터야 한다. 일본인 앞에서 더 이상 굳어서도 안된다. 이미 인턴기간도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세 달안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했다. 일본어 서바이벌이 시작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