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온 지도 금세 두 달이 지났다. 보금자리는 도쿄 고토구 스미요시(住吉)에 위치한 한 쉐어하우스에 잡았다. 드라마 라스트 프렌즈를 보며 쉐어하우스에 대한 약간의 동경을 했지만 그와는 다른 느낌의 공간이었다. 내가 있는 1층은 방 3칸이 있었고 일본인, 나이지리아인, 그리고 한국인 남성(나) 3명이 지냈다.
“콘방와(こんばんは。 일본의 저녁 인사)”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아 아침에는 주로 혼자 주방과 샤워시설을 사용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미국 종합격투기 선수 밥 샙과 비슷하게 생긴 나이지리아인 조던이 주방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도 나도 일본어가 서툴다. 그렇다고 영어를 들이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일본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콘방와, 키미짱(こんばんは。キミちゃん!)”
일본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주로 성(姓, 名字)으로 부른다. 나의 경우 김씨니 키무(キム)가 된다. 그에게도 “보쿠와 키무데스.(僕はキムです。나는 김입니다.)”라고 소개를 했다. 그런데 키무가 키미로 들렸는지 아니면 발음이 어려웠는지 항상 ‘키미짱(꼭 짱 부분 톤을 올려서)’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생긴 별칭인 셈이다.
전혀 다른 국가 출신인 두 사람이 일본어로 대화를 한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만약 일본어 회화 수업이었다면 둘 다 낙제점을 받을 수준의 일본어였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법이며 단어며 뒤죽박죽이지만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깊이 있는 대화까지는 나누지 못했지만 고향이 어디인지, 이곳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일상적인 주제는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는 야간에 매장 경호 일을 하는 듯했다.
“코레, 도우조(これ、どうぞ。이거, 받아)”
어느 날은 퇴근하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조던이 직접 만든 요리를 건네주었다. 일전에 요리하고 있는 그에게 무슨 요리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질문을 던졌었다. 그래서 내심 고향의 맛을 선보이고 싶었나 보다. 으깬 토마토(소스) 베이스에 닭과 생선을 넣고 졸인 음식을 접시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비린 음식(냄새)에 쥐약인 나는 차마 한 숟가락 이상을 뜨지 못했다. 한참을 밀폐된 방 안에서 비릿한 토마토향과 함께 그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잘 먹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미안해, 조던!
그리고 또 한 명의 1층 거주자인 일본인 다나카. 곱실거리는 더벅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 인정사정 뻗어 있는 길게 자란 검은 수염까지. 일본 드라마에 등장할 것 같은 스타일의 영락없는 일본인이었다. 그와 마주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주말이면 이따금씩 현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칸코쿠노 세-지니 쿄-미가 아리마스(韓国の政治に興味があります。한국정치에 관심이 있어요.)”
약간 괴짜 같은 느낌을 풍기는 외모와 비슷하게 건네오는 주제 또한 보통의 일본인들과는 달랐다. 한국 정치라. ‘전직 대통령의 딸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설명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얄팍한 시사상식과 알고 있는 일본어 단어를 총 동원하여 대화를 이어나갔다.
일본인과 이렇게 1:1로 대화를 장시간 나누는 경험은 좀처럼 없었다. 대학교 때 일본인 객원교수님에게 일본어 코칭을 받았던 적을 제외하고는 처음이다. 선생님도 아닌 그가 내 일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다행히 한국어와 일본어의 공통점이라면 한자 단어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방은 카방(かばん), 신문은 신붕(しんぶん), 등산은 토잔(とざん. ※일본어 자격시험 빈출 단어!) 같은 식이다. 단어가 막힐라 싶으면 우리말 명사를 애써 일본어스럽게 말했다.
‘가만있자. 간단(簡単)은 간단? 칸탄? 칸단?’
이런 식으로 유추해 나가는 식이다. 그러면 배려심 깊은 다나카는 그게 칸탄(かんたん)인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적어도 단어 틀렸다고 점수가 깎이는 일은 없다. 학교와 학교밖 일본어(를 대하는) 차이다. 그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본어 프리토킹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의 일본어 선생님이 되어 준 것이다. 쉐어하우스는 일본어 울렁증을 없애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일상 대화에 대한 부담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회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서 쓰는 일본어에는 겸양어, 존경어와 같은 경어가 추가된다. 우리말에도 존댓말이 있듯 일본어에도 이러한 것들이 있다. 있다는 표현인 이루(いる)는 이랏샤루(いらっしゃる)가 되는 식이다. 이미 대학 문법시간 때 외웠지만 입에서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와 같은 비즈니스 일본어를 능숙하게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를 사서 공부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한계점이 명확했다. 일본에 와보니 교재로 습득 가능한 일본어는 많아야 40%였다. 현장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다 서점 베스트코너 셀러에서 한 드라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
일본은 소설이 드라마화되는 경우가 많다. 한자와 나오키도 그중 하나였다. 은행원의 고군분투기를 다룬 장편 소설 우리들 버블 입행조(オレたちバブル入行組)시리즈가 원작인 드라마다. 2013년 7월부터 두 달간 총 10화에 걸쳐 방영된 작품으로 사카이 마사토(堺 雅人), 우에토 아야(上戸 彩)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은행과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당연히 비즈니스 일본어 표현도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우선 공부를 위해서 영상을 습득해야 했다. 다행히 드라마가 종영된 이후 DVD가 바로 발매되었고 인터넷 스트리밍으로도 얼마든지 쉽게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으로 했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의외로(사실은 당연히) 많았다. 그동안 들어왔던 일본어 시험용 음성과 배우들이 연기하는 음성은 많이 달랐다. 빠르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억양 차이도 있고 뭉개지기도 했으며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자막을 켜고 보더라도 메모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본을 찾아보게 되었다.
구글 검색창에 [半沢直樹 日本語字幕(한자와나오키 일본어 자막)]을 검색해 보니 다운로드 가능한 자막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여럿 있었다. 그래서 자막을 다운로드하여 프린트했다. 이로서 공부할 준비 완료. 이제 영상과 자막 프린트를 보며 본격적인 말문 트기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どうか どうか 力をお貸しください。(부디 힘을 빌려주세요..!)」
예상했던 대로 일반적인 표현 외에도 경어를 쓰는 표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貸す(카스)는 빌려주다는 뜻으로 보통은 貸してください(카시테 쿠다사이)라고 한다. 이것이 경어 표현으로 접두어 お(오)가 붙으며 て(테)가 탈락하여 お貸しください。(오카시 쿠다사이)로 변한다.
이 드라마는 은행원인 한자와 나오키가 대출 문제로 인하여 거래처들을 돌아다니며 벌어지는 은행내외의 다양한 스토리를 다룬다. 은행을 단순히 돈을 저축하고 빌리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비즈니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인 줄은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당연히 비즈니스용어 사용은 기본이다.
「やられたらやり返す、倍返しだ!(당하면 당한 대로 돌려주겠어! 두배로!!!)」
한자와 나오키가 돈으로 장난치는 악당(!)들에게 내뱉는 드라마 명대사 ‘야라레따라 야리카에스, 바에카에시다’가 나올 때면 기분이 통쾌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스토리에도 흠뻑 취했다. 공부와 재미가 한대 어우러지니 그 자체가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길에는 프린트해 둔 스크립트를 수십, 수백 번 읽어가며 입에 붙였다. 음성은 따로 녹음해서 스크립트를 볼 수 없을 때 계속해서 들었다. 걸어갈 때, 청소할 때, 회사 점심 휴식시간 때, 심지어 잘 때도 틀어 놓았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빠져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편, 두 편 공부하다 보니 탄력이 붙었고 진도가 제법 빨리 나갔다. 대략 2달 정도가 지나니 마지막 10편이 마무리되었다.
공부했으면 써먹어 봐야 한다. 더군다나 이곳은 일본 아니던가.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갉고 닦은 실력을 뽐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비즈니스 일본어를 익히기는 했지만 오피스 내 일본인 스텝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인. 오피스 안으로 들어오면 이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스텝을 붙잡고 무작정 일본어 연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일본인 바이어가 미팅 차 오피스를 방문했다. 인턴인 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기 전 인사 건네는 게 전부였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 감사합니다.)’를 내뱉자고 공부한 게 아니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한국에 돌아갈 날은 다가오는데 일본어는 왜인지 여전히 소원했다.
때마침 회사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쓰리콜 이전에 전화를 받기로 한 규칙이 있었고 내가 덥석 잡아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노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본은 70대 이상 노년임에도 사회 활동(주로 고문)하는 분들이 많다. 부장님에게 용건이 있어 전화한 바이어였다. 대충 이름은 알아 들었는데 그 이상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명하게 잘 들리던 드라마 음성과 달리 전화는 일단 음질이 나쁘다. 마치 32 Kbps로 인코딩 된 mp3파일 같다고 할까. 거기에 나이 든 분들의 일본어는 발음이 선명하지 않았다.
부장님에게는 바이어에게 전화가 왔지만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 들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혼나지는 않았지만 전화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작게만 느껴졌다. 일본까지 갔다 와서도 (심지어 드라마 일본어를 그렇게 공부하고도) 일본어 못한다는 소리가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전화로 일본어를 해보자!’
적어도 전화라면 바이어와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바이어뿐만이 아니다. 행사장, 식당 예약할 때도 전화로 한다. 적당히 경어도 쓸 수 있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나서서 직접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회사에 걸려오는 전화는 벨이 울리자마자 가장 빨리 받아 들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오뎅와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OO츠으신데고자이마스. (전화 감사합니다. OO통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