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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Nov 18. 2024

Ep9| 서바이벌 전화 일본어 끝에 찾아 온 것들

일본어로 전화하기 연습



전화받기는 언제나 자신 없었다. 익숙해지면 전화만큼 편한 게 없기도 하지만 우선 상대가 하는 말을 100% 이해한 적은 없다. 보통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두뇌를 풀가동 시켜야 한다. 말귀가 어두워 남들보다 곱절은 고생한다.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이곳 일본에서도 전화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어 말문 트기 최후의 수단으로 전화를 선택한 것은 달리 잡을 끈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지가 아니라면 쉽게 경험하기 어렵다. 회사 일과 관련 된다면 업무시간에도 할 수 있다. 전화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여러모로 전화만 한 것이 없었다. 그전에 전화 울렁증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만 기다려서는 몇 통 받지 못할게 뻔했다. 사무실에는 인턴만 6명. 다들 빛의 속도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사무실 비품주문 때 사용하는 ASKUL(아스쿠로) 카탈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은 FAX로 오더시트에 품번과 수량을 넣어 보낸다. 찬찬히 살피다 보니 ‘전화주문가능’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비품 주문전화를 내가 직접 해보자!’


FAX로 발주서를 넣으면 며칠이내 사무실로 비품들이 배달되어 왔다. FAX로 하던 것을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해보기로 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0120으로 시작하는 디렉트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음성안내음이 나온다. JLPT와 일드로 다져진 듣기 실력이 있기에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 몇 단계를 걸쳐 상담원 연결로 넘어갔다.


> “오뎅와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아스크루 탄토우노 사토데 고자이마스. (전화 감사합니다. 아스쿨 담당 사토입니다)”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본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떠듬거리는 일본어로 주문을 하고 싶다, 주문 후 언제까지 도착하냐 등, 미리 준비해 둔 스크립트도 모니터 화면에 띄어두고 전화를 시작했다. 말을 하다 보면 문법이 틀렸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시험 일본어에 익숙한 탓도 있지만 머릿속 일본어와 입으로 나오는 일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입 근육이 아직 생기기 않은 것이다.


“모우시코미 방고, 542680, 히토하코 오네가이시마스. (신청번호 542680, 1박스 부탁합니다.)”


사무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비품 A4용지 한 박스를 주문했다. 수화기 건너편 담당자는 상품명이 맞는지와 재고 및 배달 위치가 맞는지 등을 확인했다. 이 정도만 해도 전화는 마무리가 되겠지만 일부러 한, 두 마디 더 붙였다. 며칠 후에 오는지 비용 결제는 어떻게 되는지 등도 함께. 지금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었다.


> “카시코마리마시타.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약 5에 걸친 전화통화가 끝이 났다. 내 일본어가 일본인에게, 그것도 전화로 통한다는 경험을 처음으로 했다. 성격이 소심한지라 정말로 주문이 잘 오는지도 무척이나 걱정됐다. 만일 잘못 온다면 회사에 여러모로 민폐였다.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줄곧 실수만 해왔기에 의기소침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주문한 그대로 물건이 도착했다.


이때부터 전화 일본어에 자신이 붙었다. 비품 주문에서부터 식당 예약, 행사장 예약 확인 등 전화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부러 전화를 걸었다. ‘고객 입장’에서 전화를 걸었기에 부담이 적었다. 설령 틀리더라도 혼날 일이 없다. 일본어 전화통화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은 후부터는 이상하게 전화가 잘 들렸다. 입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말이 트기 시작할 때도 이런 기분일까.


전화로 일본어를 곧잘 하는 모습을 보던 회사 대리님이 하루는 통역 업무를 맡겨보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종종 일본인 바이어와 한국 업체 간 1:1 화상미팅을 주선하고는 했다. 이때 통역이 필요한데 평소에는 직원들이 담당했다. 인턴 중에는 일본어가 서툰 경우도 있어서 우선 테스트를 하고 투입여부를 결정했다.


대리님은 일본에서 이미 꽤 오래 살았고 명문대 대학원 출신이라 일본어는 수준급이었다. 그 앞에서 일본어를 하려니 여러모로 긴장되었다. 마치 첫 회사 면접 때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할 때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일본어로 말하면 듣고 한국어로 내뱉었고 역순의 경우는 머릿속에서 번역해서 일본어로 내뱉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정도면 쓸만하겠다는 평가를 받고 통역으로 투입되었다.


일본어가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업무도 순조롭게 풀려갔다. 긴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 영업에도 함께 동행하기 시작했고 바이어 앞에서 얼어붙는 일도 줄어들었다. 거기에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사업 안내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사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인턴 종료를 보름 앞둔 시점이 되었다. 이제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일본어가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말문이 튼 것만큼은 느꼈다. 자막 없이 일본 방송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일본어는 이쯤 하고 필리핀 등으로 영어 어학연수를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형민 씨를 정사원으로 고용하기로 최종 결정했어요.”


회사에서 한, 두 차례 정사원 고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대부분 대학생 인턴이었기에 고용까지 이어지기 쉽지 않았다. 중고 신입이었던 나는 고용에 있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간의 업무평가와 홈페이지 만들기라는 특기까지 더해지면서 팀을 담당하던 부장님이 본사에 정사원 고용을 제안했던 모양이었다. 일본에 더 살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2014년 2월, 일본에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재류자격인증명서(在留資格認定証明書)’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이후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인문지식, 국제업무 비자를 받아 3년간 일본에서 지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시절 일본 홈스테이 이후로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던 막연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일본인 친구 만들기 대작전



비자가 생기자마자 원룸(1DK)을 계약했다. 셰어하우스 생활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른 입주자와 동선이 겹치는 경우 씻고 식사하는 것들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일 끝나고 녹초가 되어서도 남을 신경 써야 한다는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부동산들을 돌아다니며 상담을 받았다. 외국인 불가능한 건물, 가격에 비해 너무나 좁은 건물, 초기비용(시키킹, 레이킹)이 비싼 건물 등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회사 퇴근길에 들렀던 부동산 체인에서 이벤트 물건으로 초기비용도 없고 외국인도 가능하며 내 급여로 감당 가능한 수준 (대략 7만 엔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계약도 무리 없이 2년.


은행계좌도 이쯤 해서 개설했다. 외국인이라면 쉽게 개설 가능한 우체국통장을 시작으로 회사 주거래 은행인 미츠비시도쿄UFJ은행 (현, 三菱UFJ銀行)까지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일명 3대 메가뱅크 중 하나로 한자와 나오키에 빠져 지내서였는지 메가뱅크에 통장을 개설할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기뻤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계약했다. 1년 이상 비자가 있어야 이동통신사에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빌려온 가라케(피처폰)를 사용했었다. 정부에서 받았던 인턴 지원금을 조금씩 모와 소프트뱅크에서 아이폰5s를 구매했다. 원래는 필리핀 어학연수 갈 때 밑천으로 쓰려고 했던 돈이다. 아직 신용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현금 일시불로 치렀다. 몇 달 동안은 여유가 없겠지만 즐거웠다. 일본어로 말문이 트이고 비자까지 생기니 일본 생활이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일본인 친구였다. 회사안팎으로는 한인 커뮤니티에서 속해 있다 보니 한국인들과의 교류가 대부분이었다. 팀 내 일본인 직원도 한 명뿐이고 성별도, 사는 지역도 달라 사적으로 친해지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한국에 있을 때처럼 언어교환 어플을 사용해 보았다. 언어교환 어플에도 한국어를 알고 싶어 하는 일본인 친구들이 많이 있어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온라인에 국한되다 보니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잡기 어려웠다. 한국재일문화원에 있는 게시판을 통해서도 친구를 구한다는 내용을 올리기도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대학생 때 인턴으로 있던 곳의 한국 파견(일본인) 직원 오다하라와 연락이 닿았다. 이따금씩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었는데 그가 도쿄에 온다는 것이었다. 회사 퇴근길 버스 경유지인 몬젠나카초(門前仲町)의 한 이자카야에서 그와 재회했다. 여러 일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토리아에즈 나마(とりあえず生! 술 첫 잔은 생맥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인턴으로 일할 때 내가 작성한 일본어 문장을 체크도 해주고 많은 조언도 아끼지 않았던 친구(형)다. 그때는 일본어가 짧아 몇 마디 못했었지만 이번에는 2시간 가까이 그와 웃고 떠들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일본인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고민상담을 했다. 때마침 그의 후배 중 한국사무소에 있다가 도쿄 본사로 돌아온 친구가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어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만났던 친구들과 일본에 돌아와서도 자주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오다하라 덕분에 페이스북으로 그 후배, 사이토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속전속결로 같은 주 주말에 있는 홈파티에 초대받았다.


도쿄 에비스에 사이토가 사는 집이 있었다. 방 한 개에 넓은 거실이 딸린 맨션이다. 참가조건은 각자 마실 술 지참과 음식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1천엔씩 부담하는 것이었다. 오후 1시경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선발대가 도착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채워가기 시작했고 주선자인 사이토의 인사말과 함께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사이토와 마찬가지로 한국 Y대 어학당에서 한국어 어학연수를 했던 친구들, 그리고 한국에 관심이 있는 그의 친구들이 주요 멤버들이었다. 요리도 일식과 함께 간단한 한식도 곁들였다. 오리지널 한국인은 나 혼자. 이렇게 많은 일본인 사이에 둘러 쌓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직장에서와 달리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무겁고 어려운 경어를 쓸 일도 없었고 그저 웃고 떠들다 해지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나중에는 나보다 앞서 일본에 들어온 선배 형도 모임에 초대했다.


매 주말이면 이들과 함께였다. 봄에는 사이토 집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고 날이 따뜻해지면서부터는 요요기 공원, 오다이바 등에서도 만남을 가졌다. 무더운 여름에는 나가시 소멘을 먹기도 했다. 나가시소멘은 반으로 자른 대나무를 연결해서 차가운 물을 흐르게 한 다음 소면을 물에 흘려서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 것인데 여기에 게임을 곁들였다. 소면을 바로 집으면 성공이고 실패하면 ‘한 잔’ 마시는 식이다. 한인 커뮤니티에 있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을 사이토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하며 즐길 수 있었다.


어느덧 이런 모임을 갖은 지도 1년이 되어갔다. 고정 멤버도 있는가 하면 그때그때 새로 참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름 이들 무리와 잘 어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모임을 전후로 한 하루, 이틀은 라인 그룹방이 시끌 벅쩍했다가 금세 조용해진다는 점이었다.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없을까? 내심 그런 고민이 들었다.


“라인 아이디 교환해요!”


어느 여름날 모임 끝날 무렵 몇 친구에게 라인 아이디 교환을 제안했다. 이 정도 거리감이라면 연락처 교환은 가능하겠지. 그런데 단칼에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연락은 그룹방에서만 하자는 것이었다. 개별연락은 서로의 아이디나 전화번호를 알기 전까지 불가능했다. 몇 달을 주말마다 이렇게 웃고 떠들고 지냈는데도 개별 연락은 ‘아직’이라고 선을 긋는 것을 보고 일종의 문화 차이를 느꼈다. 이런 게 일본의 인간관계인가? 왜인지 지난 시간들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일본을, 일본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더 이상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봄날 공원에서 즐겼던 노미카이. 일본인 친구들과 즐긴 마지막 하나미가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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