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JLPT 1급 (현 N1)도 따고 어느덧 병장으로 진급했다. 그동안 무의미했던 전역일 계산기도 현실감 있는 숫자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위 ‘사회’로 복귀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군대와는 0.1%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까지오니 군생활이 그럭저럭 재밌어졌다. 잠시나마 전문하사 진급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전역을 선택했다.
2010년 무더운 여름날, 후임들의 배웅을 받으며 부대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당시 안양에서 집(속초)까지 버스로 대략 4시간.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2년에 대한 회고와 함께 앞으로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갔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일본어 선생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사회로 돌아오니 다시 마음속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복학을 하는 대신 반학기 쉬면서 진로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잠시동안은 일어교육과 편입준비를 했지만 졸업하고 나서 바로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현실은 현실이다. 대신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직업적 대안은 얼마든지 있었다. 해외영업이나 무역 관련 직종을 선택하면 된다.
당시는 심각한 구직난이었다. 인문계열 전공은 소위 SKY 출신도 고배를 마신다는 뉴스가 연일 도배되었다. 문과 내에서는 그나마 상경계열이 취업에 유리하다는 기사도 많았기에 복학과 동시에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선택했다. 남은 3학기 동안 4학기 과정을 이수해야 했기에 마지막 학기까지 시간표가 꽉꽉 차 있었다. 일본어는 고급 레벨 수업 위주로 수강했다. 수업이 없을 때는 취업 스터디를 결성해 취업준비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졸업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일전에 지원한 모 제약회사로부터 서류전형 합격 연락을 받았다. 일본 해외영업팀 신입 모집이었다. 이때 스펙은 일본기관 인턴, JLPT N1, JPT 800대에 컴활 2급 정도. 면접스터디 때 익혔던 면접요령이나 예상 질의응답, 회사 사업내용까지 준비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준비했다. 그리고 면접 당일이 찾아왔다.
“형민 씨는 일본어는 되는 것 같은데 영어를 할 줄 모르나 봐요? 무역서류 보려면 영어는 기본인데.”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일본어만 되면 관련 직종 취업은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영어라니. 사실 영어가 싫어 일본어를 선택한 것도 있다. 학과 교수님들도 일본어만 잘하면 취업 문제없다고 하던 때였기에 면접만 잘 넘어가면 될 줄 알았다.
“학기 중에 토익수업을 수강했었습니다. 아직 점수는 없지만 새벽반을 다녀서라도 업무가 가능하도록 영어 준비하겠습니다.”
모의면접에서나 들어 먹혔던 답변을 내뱉었다. 이후 압박면접까지 이어지면서 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입은 계속 굳어만 갔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여긴 어딘지, 나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생애 첫 회사 면접을 보기 좋게 ‘말아’ 먹었다. 며칠 뒤 ‘불합격’을 알리는 문자가 발송되었다.
전역하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문학사와 경영학사 이수증이 적힌 졸업장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했다는 기쁨보다 취업 실패에 대한 충격이 더욱 컸다. 그때부터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일부러 피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해외영업직 모집에는 늘 ‘토익 800점대 이상’ 조건이 따라붙었다. 꿈의 벽은 방향을 틀었음에도 여전히 높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될 때까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가거나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토익 공부에만 매진했다. 영어라고 해봐야 5 형식 등 기본문법이나 아는 정도고 테스트 삼아 치렀던 토익은 400점대로 사실상 ‘찍기’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집이 강원도에서 충청도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졸업 후 그곳에서 지냈다. 충청도 안에서도 ‘리(里)’에 속하는 지역이다 보니 토익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로 유학도 수십만 원짜리 인강도 들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서점에서 산 해커스 토익책과 무료로 공개되는 모의고사 풀이영상이 유일한 교재이자 선생님이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오로지 토익만을 공부했다. 대학교 다닐 때 진작 해놨으면 좋았겠지만 후회한들 소용없었다. 일본 해외영업직에 적어도 서류라도 내려면 토익이 있어야만 했다. 영어는 여전히 싫었지만 해야만 했다. 매달 토익시험을 보기 위해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치렀다.
480… 550…580.
세 달을 밤낮없이 공부했는데 600점도 넘지 못했다. 정말 울고 싶었다. 이제 와서 꿈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도 그러더니 결국 영어가 또 발목을 잡는구나.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책상에 앉아 토익책을 펼쳐 들었다. 공부 시작 전 연습장에 ‘토익 800’ ‘일본 해외영업’이라는 문구를 가득 적으며 희망회로만큼은 꺼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네 번째 시험에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600점대를 넘은 것이다. 그다음시험도 600점대이기는 했지만 성적향상이 본격적으로 체감되었다. 이때 이미 토익 고득점을 취득한 후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점수 올리기 어려운 RC(독해) 보다는 LC(듣기)에 집중해 보라고.
눈에 보이는 RC에 비해 LC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었다. 일본어도 듣기가 약한데 영어가 될 리 있겠나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해보는 수밖에. 그때부터 LC 모의고사 스크립트를 달달달 외웠다. 모의고사 강의도 LC를 집중해서 보았고 잘 때도 LC음성파일을 틀어 놓았다. 이윽고 긴장되는 여섯 번째 시험일이 밝았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