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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Nov 30. 2024

Ep11| 일본 해외영업으로 취업하다

이윽고 여섯 번째 시험일이 밝았다. 가는 차 안에서도 토익 기출유형 문제집과 오답노트를 살펴보며 시험에 만발의 준비를 다했다. 익숙한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시험 치를 준비를 했다. 마킹이 편하도록 4B연필을, 부러질 것을 대비해 여러 자루 준비해 두었다. LC가 시작되자마자 음성이 나오기 전 재빨리 문제 포인트를 찾았다. 그리고 정답일 것으로 유추되는 문장을 집중해서 들었다. RC는 시간 안배가 생명이기에 모르겠는 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체크하고 넘어갔다. 다행히 시험종료 전까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이번에는 700점대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집에 돌아와서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6시부터 토익공부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 성적 발표날이 밝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YBM사이트에 접속했다. 화면에 성적이 떴다.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다시 한번 새로고침을 해보았다.


‘800점’


성적표에는 정확히 800이라는 점수가 적혀 있었다. 후배 조언대로 집중 공략 했던 LC에서 430점대가 나온 덕분이었다. 면접 불합격하고 토익 공부를 하면서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수십 번, 수백 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반년만에 목표 점수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운이 따라주었다.


성적을 확인하자마자 토익책을 모조리 버렸다. 그리고 일본 해외영업직이 나온 구인 공고에 서류접수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일본어책도 펼쳐 들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틈틈이 면접을 대비해 일본어 면접연습도 시작했다. 체크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핸드폰 카메라로 내 모습을 촬영했다. 스스로 분석하고 평가해서 고쳐나갔다.


새해가 밝은 어느 날 모 섬유회사에서 서류합격 통보를 받았다. 다시 결전의 순간이 밝았다. 이곳은 1차, 2차 면접으로 나뉘는데 1차 면접 때 인성면접과 함께 일본어 논술 테스트가 있다고 했다. 필기구도 지참하라는 안내였다. 간신히 토익을 넘어서니 이번에는 일본어 논술이라. 사실 일본어는 보고 읽을 줄 알지만 (한자) 쓰기는 거의 되지 않는 상태였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생각에 연습하는 마음으로 면접길에 올랐다. 내가 속한 면접 그룹에만 대략 10명 정도가 있었는데 면접 전 잠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일본에서 초등학교까지 나온 친구도 있었고 외대 출신도 있었다. 걔 중에는 경력신입도 있었다. 그래서 일말의 희망도 갖지 않고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인성면접인 만큼 전문성보다는 평이한 질의가 이어졌다. 영업직이니만큼 술자리나 출장은 피할 수 없는데 괜찮겠냐는 질문에서부터 본인이 이룬 성취에 대한 것들이었다. 대학 때 술을 즐기면서도 수업을 한차례도 빼먹지 않았던 부분과 첫 면접 실패 후 토익 800점 취득하기까지의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행히 면접관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대망의 일본어 파트. 먼저 일본어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일본어로 말을 할 수 있는지 여부만 확인하고 싶었는지 20~30초 이내로 짧게 말하라고 했다. 학교 수업시간에 수도 없이 일본어 발표연습을 했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나서 대망의 일본어 논술평가가 시작되었다. 논술 주제는 유비와 다른 인물의 리더십 비교였다. 부끄럽지만 삼국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의 도원결의에 대해서만 조금 알 뿐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주제가 나왔을까. 잠시 패닉상태에 빠졌다.


연필을 내려 놓을까 싶다가 마지막까지 최선은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 구석 구석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대통령'이 생각났다. 그들을 역대 두 대통령에 비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물이 문제로 제시된 인물의 성격(리더십)과 맞는지 확신은 없었다. 그저 열심히 히라가나(!)로 써 내려갔을 뿐이다. 논술을 대비해 JPT 단어장에 나오는 한자를 여러번 손으로 쓰며 달달 외우기는 했지만 한자는 거의 쓰지 못했다.


논술(이라기 보다는 창작)이 끝나고 나서는 일본 신문기사를 번역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내용은 일본 유니클로 계열인 GU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는 GU가 무슨 브랜드인지 SPA가 뭔지 일절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저 학부 수업시간때처럼 순차적으로 번역해 나갔을 뿐이다. 다행히 한글로 적는 것이니 부담은 없었다. 


이렇게 면접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엉망진창으로 적은 논술이 부끄러워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어차피 떨어질게 분명했다. 전보다 더 열심히 구직 사이트에 접속해서 서류를 넣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났을까 문자 한 통이 왔다. 2차, 임원면접 연락이었다.


다시 그 회사로 향했다. 1차 때와 달리 이번에는 단 둘만이 있었다. 당연히 붙을 줄 알았던 친구들이 아닌, 한 살 위 형과 나 뿐이었다. 1차 면접 끝나고 회사에서 제공해준 점심식사를 하면서 조금 안면을 튼 사이였다. 혹시 우리 둘이 붙은 건가? 서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더이상 사람이 오지 않았다.


이윽고 2차 면접이 시작되었다. 인사 담당자로부터 임원실 안내를 받았다. 그곳에는 고령의 (부)사장님이 통가죽 시트로 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네모난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리에 착석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그로부터 회사의 역사와 앞으로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면접이라기보다 면담이었다. 면담 말미에 논술에서 삼국지 인물을 대통령과 비교해서 쓴 것이 재밌는 발상이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맞았는지 틀렸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도는 통했던 모양이다.


어느덧 대화가 마무리 되어 갈 무렵 인사팀에서 상장 케이스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거기에는 ‘사원 임명서’라고 적힌 문서가 담겨 있었다. ‘2013년 3월 1일부로 김형민을 5급 사원에 채용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목표를 이루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일본 해외영업 담당으로 진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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