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민 Dec 02. 2024

Ep21| 일본어로 화내봤어?

히가시 신주쿠역 도보 3분거리에 위치한 회사. 긴장감을 가득 안고 안내데스크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안내전화(우케츠케뎅와受付電話)로 면접 왔음을 알렸다. 잠시뒤 일본인 직원이 나와 회의실로 안내해주었다. 8평 남짓한 회의실에 면접관이 들어올때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서있었다. 


이윽고 중년의 여성과 남성이 각각 들어왔다. 여성은 한국인이자 회사 대표였고 남성은 일본인이며 영업부장이었다. 대표님과는 잠시 한국말로 인사를 건낸뒤 일본어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영업부장은 전혀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수차례 면접 경험이 있었기에 막상 면접이 시작되고 난 이후부터는 크게 막힘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무슨말이 오고 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면접이 그랬던 것 처럼. 다만 일본인 직원수에 대해서도 물어본 것만은 기억이 난다. 회사직원 중 절반이 일본인이고 앞으로 배속될 영업부는 영업지원팀 사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이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면접이 있은 몇일 뒤 회사로부터 채용통보를 받았다. 급여도 기존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직책도 팀장급. 나와 함께 일하게 될 일본인 사원도 추가로 채용되었다. 팀을 이끌어 실적도 쌓고 인정받아 임원급으로 성장하리라는 야심까지 생겼다.


한껏 부풀어 오른 어깨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영업지원팀 업무는 대부분 엑셀과 ERP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 엑셀은 왠만큼 쓸 줄 알았고 ERP도 이전 회사에서 어느정도 다루어보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입/출고 되는 재고수량 관리하고 발주서에 맞게 출하지시를 넣고, 월말이 되면 거래처에 보낼 계산서 정리하고. 정말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A상사 입니다. 이번에 발주서를 넣었는데 언제까지 납품 할 수 있나요? 품번(카타방.型番) A001 지급(시큐:至急)으로 요청합니다.”


업무 루틴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나서부터는 직접 전화도 받았다. 카타방? 시큐? A001? 상대방이 하는 말은 알아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회사에 주로 걸려오는 전화는 이와 같이 납기나 재고확인 전화였다. 단어들도 평이했는데 비(非)유통업계, 한국 거래가 많은 분야에서 근무 하다보니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재고표에는 이미 5천개가 넘는 아이템(SKU), 창고별 재고, 입고 예정일까지 수많은 데이터가 담겨 있었다. 컨트롤+F로 상품을 찾아도 무얼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도저히 알길이 없었다. 거래처 담당은 기다리고 있고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기로 하고(이를 오리카에시:折り返し라고 한다.) 사수에게 묻고 또 물어 간신히 내용 확인 후 답변 할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납기 맞추기였다. 11월 20일에 출하하기로 거래처와 약속이 된 상황이라 당일에는 무조건 출고가 되어야 했다. 위탁 된 창고의 관리시스템(WMS)에 접속해 재고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몇일째 입고 대기중으로 나와있었다. 이상했다. 그 길로 창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확인을 요청했다.


“요즘 창고에 들어오는 물량이 많아요. 급한거(至急)는 급하다고 사전에 얘기하세요.”


너무나 딱딱하고 불친절한 창고 담당.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걸까? 알고보니 사내에도 그의 불친절함은 정평이 나있었다. 관리물량도 많아 쉽사리 창고를 옮기지 못한다고 했다. 되도록이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빈번히 요청들을 거절하거나 이레귤러(불규칙: イレギュラー) 안건이라며 추가비용을 요구했다. ‘친절한 일본인’이라는 말은 이날 이후로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매일 같이 분노 게이지가 차올랐다.


그러다 한번은 재고를 확인하고 출고를 요청했는데 취소된 건이 있었다. 실재 재고와 이론 재고가 달랐던 것이다. 알고보니 창고측 실수였다. 납기 안내도 거래처에 다 한 상황인데 이제와서 재고가 없다니. 상황 확인 요청에 대한 메일 답변은 ‘직원 실수’가 전부였다. 평소 우리 실수는 냉정하게 대하면서 정작 본인들 실수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뚜껑이 열려버렸다. 수화기를 들어 당장 그에게 전화했다.


“이제와서 재고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고등학교때부터 일본어를 배워오면서 단 한번도 일본어로 화를 내본적이 없었다. 교과서나 회화책에도 일본어로 화내기 방법이나 표현 같은게 나올리 없다. 일드에서나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해 종종 나오는 장면이었지 실제로 언성을 높이게 될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머릿속에서 한국어 일본어로 전환될 틈 따위는 없었다. 단전에서부터 일본어가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매일 같이 이런 크고 작은 이슈들이 생겨났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건 큰 착각이었다. 부풀었던 어깨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공기가 빠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놓치거나 실수하는 일들도 늘어났다. 신제품 발매를 앞두고 대량 발주서가 들어왔을때는 매일 같이 첫차를 타고 출근해 막차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일본 전국에 거래처가 있다보니 정리해야할 발주량도 만만치 않았다. FAX 발주서를 보내는 거래처들이 많았는데 일일히 수기로 시스템에 입력을 하다보니 실수가 연달아 발생했다.


그토록 원하던 일본어를 쓰는 환경에 노출되었다는 기쁨은 금새 잊혀졌다. 피로에 찌들었고 재고와 납기문제로 사내외 일본들인들과 설전을 벌였다.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점심시간에는 일본 소설책 문장도 외웠다. 한번도 보지 못한 단어나 표현이 수두룩했다. 이를 바드득 갈면서 일본어를 공부하게 될 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