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와서 줄 곧 한인기업에만 있었다. 기업 특성상 한국어 사용비중이 많다. 그러다보니 일본어 실력은 둘째치고 이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럴려고 일본에 왔나. 이따금씩 오는 슬럼프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직이었다.
취준생때처럼 새롭게 사진도 찍고 정장도 사고 서점에서 이직과 관련된 책도 사서 읽으며 이력서, 자기소개서 그리고 면접까지 철저히 준비했다. 우리나라 인적성과 비슷한 시험인 SPI도 준비했다. 성격 검사, 능력검사(언어, 비언어), 영어, 구조적 파악 영역으로 구성된다. 때마침 면접(아닌 면담) 연락이 온 회사에서는 SPI 시험이 입사과정에 포함되 있었다.
도쿄 고탄다(五反田)에 위치한 온라인 쇼핑몰 회사에 면담을 위해 방문했다. 일본에서 갖게 된 첫 면접 기회였다. 면접관으로 나온 실무자는 여러차례 면접이 아니라 면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다소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사내 회의 부스에 앉아 회사 소개를 들은후 나의 이력에 대해 30분여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되었다.
어렵사리 잡은 면접 기회였는데 첫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그 다음 스텝으로 SPI가 진행되었다. 면담 후일에 채용담당으로부터 이메일로 시험을 치를 URL을 전달 받았다. 능력검사 35분, 성격검사 30분으로 도합 65분 시험. 이미 컴퓨터로 치르는 CBT시험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응시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언어영역은 JPT를 치루던 경험과 기출문제에서 열심히 외운 내용으로 정답을 찾아 나갔다. 하지만 비언어 영역이 나오면서 두손, 두발 들 수 밖에 없었다. 수리, 추리에 해당하는 문제들이 나오는데 소위 말하는 수포자(수학포기자)였기 때문이다. 풀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점수는 알 수 없었지만 특히 비언어에서는 낙제점이 나왔음이 분명했다. SPI 시험 이후 몇일이 지났을까 채용담당에게 회신이 왔다. 메일 말미에는 ‘김씨의 무궁한 활약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金様のより一層のご活躍を心よりお祈り申し上げます。)’라고 적혀있었다. 불합격이다. 이날 이후로도 여러번 이 문장을 메일로 접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정말 고통스러웠다.
이케부쿠로(池袋)에 위치한 서플리먼트 쇼핑몰 회사에서도 면접을 보았다. 이곳도 인적성검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필기시험이었다. 면접 준비물로 필기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인적성검사를 할 동안은 면접관들이 들어오지 않고 나홀로 풀 수 있었다.
문제는 시사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정치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쉽게 답할 수 있었을 법한 문제였다. 하지만 일본 시사상식까지 공부한적이 없었기에 쓸 수 있는 내용이 그다지 없었다. 더구나 한자를 손으로 써야 하는데, 내 이름과 집 주소 말고는 바로 튀어나오는 글자가 거의 없었다. 눈으로 보면 다 아는 글자이지만 손글씨는 또 달랐다.
“일본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 가족들이 돌아오라고 하지 않던가요?”
인적성검사가 끝이나고 실무진 면접관들이 들어와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다. 이날, 그리고 이후로도 있던 면접에서 단골로 나온 질문이었다. 외국인은 언제든 모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고용불안(리스크)을 느끼는 듯 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평생 살 계획이다.’였다. 일본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런 삶을 살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면접관들을 보며 내심 안심했다. 그러나 낙방.
일본인들과 비교 했을때 외국인을 고용할만한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나보다. 어쩌면 이력서 불합격 사유로 들었던 ‘일상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울 것 같아서’도 진심인지 모르겠다. 기술적으로는 그들보다 낫다 한들 언어나 사회상식을 이길 재간이 없다. 80점짜리 외국인보다 60점짜리 일본인이 더 나은 선택지였다거나 혹은 60점짜리 외국인이었기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저 면접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공법으로 가는데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방향성을 조금 틀었다. 한인계 기업에 지원하되 일본인 비중이 높은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한인 기업 구인정보는 동경 유학생모임 일명, 동유모 카페에 활발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학때부터 일본에 워킹홀리데이 가는 선배들이 자주 이용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일본에 올때 임대폰 등 여러 도움을 받은 곳이기도 했다.
주로 요식업 관련된 구인이 많았다. 희망 직종이었던 이커머스 분야도 일부 있었지만 규모나 급여조건이 기대와 맞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신주쿠(新宿)소재 한 기업 구인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모바일 악세사리를 취급하는 유통회사였다.
직종은 영업지원. 희망분야와는 달랐지만 영업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기에 영업지원의 역할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직원 비율도 한국인, 일본인 절반정도였다. 급여도 나쁘지 않았다. 그길로 게시물에 적힌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냈고 얼마 뒤 면접일정이 잡혔다. 이번이야말로 꼭 면접에 붙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