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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Dec 07. 2024

Ep22| 악몽 속 일본어

하루 24시간, 일본어를 사용하는 생활. 원하던 바였고 다시금 꿈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여행에 변수가 존재하듯 일본어 여정도 그러했다. 새 회사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같이 일본어로 논쟁을 벌여야 했다. 


(株) OO (주식회사 OO)

キム様、お世話になっております。(키무사마, 오세와니 낫떼오리마스)


아침 9시 출근 후 자리에 앉으면 메일함을 열어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메일이나 전화할 때 시작 되는 말머리인 ‘오세와니 낫떼오리마스’. 신세 지고 있습니다는 뜻의 비즈니스적 인사 관용표현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아직 거래를 하지 않았어도 ‘오세와’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인사말 이후부터 본론이다.


‘납기 어떻게 됩니까?’

‘상품 B 품질 문제가 있습니다.’

‘대금 입금처리 해주세요’


매일 적게는 수십, 수백 통의 이메일과 전화통화가 이와 같은 주제다. 한국어로 생각해서 일본어로 대답한다면 절대 업무시간 내에 일을 마칠 수 없다. 퇴근 시간이 밤 10시, 11시를 지나간다. 피로가 쌓이면서 사소한 실수도 늘어났다. 마치 졸음운전을 하는 것처럼.


불안한 여정은 계속되었다. 입사 후 사수의 퇴사 예정사실을 알았다. 3개월 뒤 그가 퇴사하고 나서는 기댈 곳이 없어졌다. 영업지원팀장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내야 했다. 루틴 한 업무도 처리하고 타 부서와 업무협업 하고 팀원 관리도 하고. 물론 대부분은 일본어로 소통했다.


‘일 잘한다’는 말에 묘한 희열감을 느끼던 때였다. 전 직장에서 인턴을 거쳐 정사원이 되어 일하는 동안 그러했다. 이번 회사에서도 임원급 성장을 꿈꾸었기에 일 잘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한’ 일을 하고 싶었다.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회사 기존 시스템에 개선할 것이 없는지도 찾아보았다.


메일함을 닫은 후에는 재고관리시트를 작성했다. 기간 시스템에서 로우 데이터(RAW DATA)를 받아 엑셀에 각 아이템별 재고 정보를 업데이트해 사내에 공유하는 식이다. 주로 정성적인 일을 하던 이전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정량적인 일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숫자에도 느슨했고 엑셀 함수 VLOOKUP으로 불러온 데이터는 최종 확인이 부족했던 탓에 재고시트에 크고 작은 오류가 많았다. 족히 5천여 개가 다 되는 상품 데이터를 함수로 불러오면 파일이 제법 무거워진다. 계속해서 핑글핑글 도는 마우스 커서 밑 동그라미를 보며 수 분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효율적이었다.


엑셀 대신 쓸만한 툴이 없는지 찾아보았고 구글 스프레드시트부터 에어테이블, 노션 등 다양한 도구들에 재고데이터를 연동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마지막에는 VBA도 공부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나마 INDEX, MATCH 중첩 함수로 VLOOKUP으로 인한 실수는 줄일 수 있었다.


“김상, A아이템 재고가 이상한 것 같아요. 다시 체크해 주세요.”

(※일본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성(姓)+상(さん)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유통업에서 재고 1개가 갖는 의미는 크다. 재고 1개를 확보하기 위해 거래처들은 미리 돈을 지불하기도 하고 예약을 걸기도 하고 그들의 손님과 약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해진 날짜에 온전한 상품이 도착해야 한다. 도구에만 집착했던 탓에 이러한 본질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업무량과 비례해 늘어나는 실수, 그리고 피로. 이 무렵 처음으로 일본어로 말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일본어 초/중급이던 시설 이 정도 경지에 오르는 것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꿈에서도 일본어로 싸우고 있었다. 아니, 혼나고 있었다. 악몽 그 자체였다.


입사 전 72kg였던 몸무게는 몇 개월 사이 60kg 초반으로 급속히 빠졌다. 건강에도 이상신호가 왔고 신경도 예민해졌다. 일본인들, 심지어 한국인들과도 말을 섞는 것이 싫어졌다. 팀원의 실수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김상, 데이터가 이상해요.”


대표님에게서 내선 전화가 걸려왔다. 재고와 매출동향을 세심히 살피는, 숫자에 예민한 대표님 눈에 나의 불완전한 재고시트는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원인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에 원인에 대한 추궁이 이어졌다. 이런 면을 존경했는데 이미 무너진 정신상태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보다.


> ”대표실로 가겠습니다.”


대표실에 있는 작은 원탁 테이블에 마주하고 앉았다. 문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전달했다. 대표님의 피드백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업팀으로부터 불만사항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직접 말로 할 것이지.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 욕하고 있다는 배신감에 머리가 멍해졌다.


일본어, 영업팀장, 임원.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잘못 꿰어진 단추를 풀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가동이 시원하게 될 리 없었던 뇌 회로는 예상치 못한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만두겠습니다, 단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습니다.


큰 기대감을 안고 출발했던 새 회사생활을 반년만에 마무리 지었다. 일본에 오고 나서 5년 만에 처음으로 긴 휴가를 얻었다. 밀렸던 잠을 청하기도 했고 서점에서 책을 사다 온종일 집에서 읽기도 했다. 일본에서 앞으로 무얼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퇴사하고 2주쯤 지났을까,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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