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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Dec 09. 2024

Ep23| 일본어로 공기를 읽어라

오래 쉴 팔자는 안되나 보다. 퇴사하고 3주 만에 다시 다음 직장 출근날짜가 잡혔다. 한 살 위 형이 다니고 있는 한인계 회사. 이번과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일본인 비율이 절반씩 되었다. 홈쇼핑 벤더사로 내가 맡을 업무는 이커머스, 온라인 쇼핑몰이다.


매일 아침 순환선인 JR야마노테선(山手線)을 타고 도쿄 고탄다 TOC 빌딩으로 출근했다. TOC는 도쿄 오로시 센터의 약자로 오로시(卸し)는 도매를 뜻한다. 1970년에 지어진 붉은색 벽돌 건물. 1층에는 유니클로 대형매장이 들어서 있다. 약 400여 개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산리오(sanrio) 본사가 한때 있던 곳이기도 하다.


건물 12층 한편에 위치한 이 회사에서는 한국 브랜드 주방용품을 홈쇼핑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홈쇼핑에서 온라인 쇼핑으로 넘어가는 추세였다. 비록 팀장급에서 일반 사원급으로 마이너 전직이었지만 가장 욕심을 내고 있던 분야였기에 선뜻 입사 제안에 응했다.


업무는 오전 9시 전체 조례(朝礼 쵸-레-)로 시작된다. 한때 일본 회사 90%가 조례를 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사무실 가운데 전원이 둘러 모여 그날 주요 이슈에 대해서 간단히 발표를 한다. 일본인 직원도 있기에 물론 일본어로 진행된다. 전 직장에서 일본어 회로가 완성되었기에 흡수가 빨랐다. 일본어 울렁증도 없었다.


조례가 끝난 후 데스크에 앉아 밤사이 들어온 주문을 처리했다. 이번 회사는 이제 막 온라인 쇼핑몰에 투자를 하고 있던 때라 체계가 잡히기 전이었다. 주문확인 버튼을 누르고, 주문확인 메일을 보내고, 출고표와 운송장을 뽑아 들어 재고를 확인하고… 반년 간 경험한 영업지원팀 업무덕에 어려움이 없었다. 버릴 경험 하나 없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직접 개인 고객들에게 상품을 포장해서 보내고 그들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점이다. 택배는 받아만 봤지 직접 보내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사가와큐빈(일본의 메이저택배 중 한 곳)에서 다이샤(台車: 운반용 손수레)를 가지고 와 짐을 실어간다. 포장이 잘 되었는지 송장은 맞게 붙었는지 확인 후 고객들에게 송장번호를 안내하는 것으로 그날의 메인 업무는 마무리되었다.


이후로는 경험을 살려 재고를 정리하고 부족한 재고는 지하창고에서 오피스 출하작업실로 옮겨 두었다. 라쿠텐, 아마존재팬, 야후재팬쇼핑 등 일본 내 주요 온라인쇼핑몰 이벤트에 맞추어 할인기획을 구성하고 사장님에게 품의(稟議 링기)를 올렸다. 운이 좋게도 입사 후 팀 매출은 꾸준히 성장곡선을 그려나갔다.


이 무렵부터는 특별히 일본어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네이티브급은 아니었다. 소비자들 (고객)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점은 어렵거나 고급스러운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쉬운 말로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대화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JLPT N2 수준의 단어나, 문형이라면 충분히 커버 가능했다.


공기를 읽는다. (空気を読む : 쿠이키오 요무)


일본 드라마에서 익혔던 표현으로, 분위기를 파악하라는 의미다. 단어가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TV방송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자막을 보면 모르는 단어들이 나온다. 하지만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모르는 단어가 선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것들만 따로 사전을 찾아보고 익혀 나가는 식으로 방향을 바꿨다.


일본에서 첫 서류전형 거절 사유였던 ‘커뮤니케이션이 안될 것 같아서’는 유효하지 않음을 몸소 실감했다. 언어에 자신감이 붙으니 일하는 것도 재미있어졌다. 팀 동료들과 함께 땀 흘리며 배송상품 포장도 하고 매월 매출 기록도 경신하고 택배에 동봉할 선물과 전단도 기획해서 만들기도 했다. 별 다섯 개 리뷰도 속속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일본 내에도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에 처음 왔던 2013년도만 해도 3.7%대였던 이커머스 구매비율(電子商取引の EC化率)도 2021년에는 8.8%대까지 올라섰다. (*2023년 9.38%) 일본에서 이커머스 성장과 함께 A부터 Z까지 경험해 본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동안 꺼져있던 어깨도 다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에 와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일본인 대표에 의해서 운영되는 일본 로컬 회사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일본 한인계 기업에서 일하면서 느낀 가장 큰 단점은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일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확히 무엇이 한국식인지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다만, 군생활 하면서 겪었던 운영 방식이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다녔던 한국계 회사에서도 고스란히 느꼈다는 점이다.


첫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 할 수 있을 때 하자. 이제야말로 일본회사로 가자. 일본사회에 제대로 녹아들어 가 보자. 후회는 그때해도 늦지 않다. 코로나로 어수선한 시국이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이력서에 넣을 사진을 새로 찍는 것부터 다시 이직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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