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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Jun 24. 2022

퇴사와 맞바꾼 일 잘하는 법 3가지

지키고, 깨고, 떠난다.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마지막 출근 날이 밝았다.


입사 후 반년만에 4번째 회사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조기에 임원급으로 성장해서 회사 경영을 맡으며 일본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뉴커머가 되리라고 상상하던 나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지난 6개월간의 시간이 나에게 남긴 것은 눈가의 짙은 다크서클과 10kg나 줄어버린 체중, 그리고 일 잘하는 법 3가지였다.


의욕 충만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나는 바로 직전 회사에서 경영에 참여 했던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되어 입사와 동시에 팀장급으로 일을 시작했다. 사장님은 얼마든지 회사의 부족한 점이나 개선 포인트를 이야기 달라고 말씀 하셨다.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이 나중에 얼마나 큰 독이 될지 이때는 미처 몰랐다. )


당시 소속 되어 있던 팀은 영업부. 나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회사내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많은 부서였다. 거래서도 일본회사들이었기 때문에 전화 통화나 이메일 모든 것이 일본어였고 이때 일본어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크게 성장했다. 


영업지원팀 팀장으로서 했던 일은 아침에 출근하여 이메일과 FAX를 통해 접수한 발주서를 확인하여 ERP시스템에 등록하고, 그 데이터를 재고관리시스템(WMS)에 업로드하여 출하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각 거래처에 납품 일정을 안내하면 중요한 업무는 마무리 되었다. (여기에 재고 입/출입 관리 및 보고 업무도 포함된다.)


이렇게나 세상 심플해 보이는 일 임에도 기존 멤버들은 매일 같이 야근을 반복하고 있었다. 각종 난잡한 이론들로 무장 했던 나는, 일을 새로 배우는 것 보다 기존 방식의 비효율성을 찾고 개선해 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입사 후 두 달 정도는 전임자가 있었기 때문에 급한 불은 언제나 금방 꺼졌고 더욱더 나는 기존의 것을 고치는데 몰입하고야 말았다. 그러다가 그가 떠날 무렵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모바일 악세사리를 취급하는 회사의 경우 보통 신형 아이폰이 출시되는 9월 전, 그러니까 대략 여름부터 신형에 맞는 케이스 예약 발주가 시작된다.


인구 1억 2천만.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두배 이상의 인구와 3배 약 3.8배의 면적을 가진 일본 전체를 상대로 하는 유통사(대리점)가 처리해야 할 물량의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 더욱이 중앙에서 일괄 통제하는 곳 보다 각 지점으로 바로 물건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는 거래처가 많았고 그 수만큼 발주서의 양도 늘어났다. 


매일 막차 시간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 발주서 입력 작업.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원격제어를 통해 집에서까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일을 처리하고 8시까지 출근해서 다시 그날 심야가 되어서 (억지로) 퇴근. 이런생활을 퇴사 직전까지 반복했다. 당연히 사람이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일을 배우기도 모자를 시간에 기존에 것을 낡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바꾸려고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은 익숙하지 않은데 업무는 늘어나고. 이를 해결하려고 또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할 때


더욱이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납기'에 대한 인식 부족이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서비스 용역 일을 했었고 어느정도 납기 지연에 대해서 서로간에 암묵적으로 이해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대부분 술 접대로 해결했지만)


그러나 유통에서 이는 용납 되지 않는 일이었다. 상품별 재고가 한정 되어 있는 상황에서 출하 우선순위가 있는데 나는 그 부분을 제대로 체크하지 않고 (사실 못했다.) A가 아닌 B사에 납품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당장 재고가 급했던 A사에는 납기일정이 지연된다는 통보를 하게 되었고 영업 담당에게 클레임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A사 또한 고객에게 00일까지 상품을 전달 드리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형민 팀장님. 전체를 보세요."


사장님은 늘 나에게 '전체'를 볼 것을 당부했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문제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사장님의 말을 그저 잔소리 정도로만 여겼다. 그동안은 테스크 한개 한개 처리해 내다 보면 어느사인가 전체가 끝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취급하는 상품 대다수가 한국 등 해외에서 수입해 오는 회사의 특성상 리드타임에서부터 항만 스케줄, 창고 상황, 입고/검품 일정, 일일 출하 가능 개수, 납기 예정일, 배송차량 수배 등 이 과정 중 어느 것 하나라도 틀어지면 전체가 꼬이기 시작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인력과 시간 발생, 발주 취소 등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렇게 점점 회사에서 일 못하는 천덕꾸러기로 인식 되어 갈 때즘 사장님이 한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형민 팀장님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 있어서 공유해요."


거기에는 '슈하리 (守破離:しゅはり, 수파리)'라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일본의 다도, 무도, 예술 등의 사제 관계 방식 중 하나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슈(守) : 틀을 지킨다. (기존의 방식을 따른다.)

하(破) : 틀을 깬다. (기존의 방식을 개선한다.)

리(離) : 틀을 떠난다.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것을 만든다.)


당시 이 메일을 받고 기분이 나빴을 뿐만 아니라 무시 당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당연히 나는 일 잘 하는 사람이고 아직은 익숙하지 못해서 그럴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던 터였다. 이 이후로도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 했고 그때마다 회사내에서 마찰은 계속 되었다. 


"더이상 일 못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습니다."


여느때처럼 새벽 4시부터 시작 된 업무와 사고 발생과 동시에 걸려온 사장님의 전화. 20분 넘게 수화기로 설전을 벌이다 이어진 대면 미팅. 그 자리에서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내뱉고야 말았다. 그로부터 보름 후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몰랐다. 이곳에서 있었던 지난 6개월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성장해 있었는지. 그리고 전체를 보는 것과 슈하리가 가져온, 일을 대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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