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시작점에는 항상 큰 포부가 존재했다. 이룰 수 없었던.
"나 이제 은퇴해도 되겠어. 잘 부탁합니다. 형민씨."
언제나처럼 첫 시작은 훌륭하리만큼 훈훈했다. 함께 참여한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한 후 연이은 면접 낙방 이후 전략을 바꿔 도전 했던 회사에서 2차 면접이 끝남과 동시에 고용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정말 기분이 묘했다. 5년간 지냈던 둥지를 떠나, 그것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을 이를 두고 전직(転職)이라고 한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날개짓을 하며 그동안 펼쳐보지 못했던 나의 잠재능력을 마음껏 펼칠 순간이 곧 다가 오리라고 굳게 믿었다.
주식회사 최고코리아의 이사회 이후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난 3년간 안간힘을 다해 이끌어 왔던 해외온라인판매대행 사업이었지만 더이상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온라인 마케팅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네. 우리 제품 이제 노출 늘어나면서 판매건수도 올라갈거구요. 이번주에 고객들에게 메일 매거진 발송 예정입니다."
그날도 판매위탁을 맡긴 기업 담당자들과 통화를 하며 언제나와 같은 레파토리로 마치 Ai 스피커처럼 답변을 했다. 사실 이것도 우리에게 일을 맡긴지 얼마 안된 곳에나 통하는 말이었지, 이미 2년 이상인 기업들에게는 씨알도 안먹히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 액정화면에 표시되는 전화번호. 아.... 또 OO회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오늘은 어떤 변명을 해야할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만일 이 전화를 받게 되면 또 죄송합니다는 말과 함께 수십분을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실제로 통화를 하는 동안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부기관, 그리고 중소기업들에게서 업무를 받아 수행하는 회사이다보니 갑도 을도 아닌 병, 정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나는 형식적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맡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그나마 내가 제일 잘 알았기 때문에) 쇼핑몰 SEO최적화며 광고 집행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몰랐다. 개인적으로 책도 보고 유튜브나 유료 강의 컨텐츠도 보기도 했지만 이론을 실전으로 가지고 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 현지내 사입이 아닌 해외배송이라는 (당시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 회사에는 마케팅/광고에 쓸 예산이 부족했다. 여느 정부사업이 그렇듯 사업 전과 후로 나뉘어 사업비 대금이 정산 되기 때문에 바이어 매칭 상담회나 전시회 운영 등 행사를 한번 치를 때 마다 회사에서 선(先)부담해야하는 비용이 컸기 때문이이었다.
나는 더이상 장미빛만 제시하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그리고 실제로 매출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2017년 12월 31일부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이직(離職)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는데 일본은 전직(転職)이 이를 대체한다. 사직서 제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전직 활동을 시작했다. (회사와의 합의로 다음 직장이 구해질때까지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일본에 있는 각종 전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했고 수 곳의 전직 에이전트 회사에 방문하여 상담을 받았다.
"우리 회사는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을 일본어로 합니다. 따라서 외국인 채용은 어렵습니다."
이력서를 넣었던 회사에서 받은 서류전형 불합격 이유였다. 나는 온라인 쇼핑몰 포지션에 이력서를 넣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뒤늦게나마 온라인 쇼핑몰 붐이 일면서 기존 기업들 뿐만 아니라 신생 회사들도 이커머스(EC) 시장에 뛰어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연히 이와 관련된 포지션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갈 수있는 자리가 없었다. 그 첫번째 이유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일본에서 먹고 살고 있는데...
온라인 분야에 대한 능력도 이렇다할 매출 성과를 내 본 경험이 없던 나에게, 아무리 일본에서 커지고 있는 시장이라고 해도 전직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그러다 운이 좋게 3곳의 회사와 면접 기회가 잡혔다. 생애 첫 일본회사 면접이었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건가요?"
"아닙니다. 저는 일본에 사는 것이 좋고 귀사의 EC 경쟁력 확대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면접 단골 질문이었다. 외국인을 고용한 다는 것은 일반적인 회사에도 큰 리스크이다. 언제 자국으로 떠날지도 모르고 외국인 고용에 대한 노동법도 존재하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회사에 따라서는 면접전형과 더불어 SPI라는 적성검사(삼성전자 GSAT와 비슷한)가 존재했다. 일본의 시사상식, 국어(일본어)와 더불어 수리능력형 문제 등이 출제 된다. 주어진 시간 내에 해결해야 하는건 둘째 치고 수포자인 나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수리능력형 문제는 공략이 어려웠다. 그렇게 모두 낙방.
사실 지난 5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계 회사에서 한국 사람들과 일했기 때문에 이제는 일본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이력이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한국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취업 공고를 살펴 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한 유통업체의 '영업지원팀 충원 공고'였다. 모바일 IT 제품을 취급하는 회사였고 보아하니 한국인과 일본인 비율이 절반씩인 듯 했다. (그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복리후생 조건도 좋아 보였고. 비록 내가 원하는 EC 분야는 아니었지만 물류 관리 등 상품 매출과 연관 되는 업무였기에 매력 있어 보였다.
그렇게 이력서를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 당일날, 한국인 여(女) 사장님과 영업부를 총괄 하는 일본인 부장님이 면접 자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의 경험들을 이야기 했고, 다소 부정확하기는 했지만 부장님도 나의 일본어가 그리 문제 될 만한 건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정확히 어떤 말들을 했었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사장님의 질문에 내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모습과 사업을 시도해 보았던 경험(이번 회사)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면접 몇일 뒤 2차 면접을 보자는 연락을 받았고 그 후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2018년 4월. 나는 주식회사 최고코리아를 뒤로하고 새로운 일터로 향하게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인생 마지막 회사라는 생각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