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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Sep 20. 2022

일본어 말문 트기 대작전

Ep03. 일본어 울렁증을 없애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사무실 전체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내 시선은 전화기를 향해 있었지만 선뜻 손이 나서질 않았다.


"누가 전화 좀 받아봐"


사무실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체로 인턴들이 먼저 받은 다음 용건 확인 후 해당 상급자에게 내용을 전달하는 식이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수화기에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고 정직원 중 한명인 장 대리님이 전화대응 지시를 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받았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H통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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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는 거야)


일본어 울렁증. 그것이 문제로다.


꿈에도 그리던 일본 생활이라 부푼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금새 현실문제에 부딪혔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에서는 일본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TV를 틀어도 길거리를 지나 다녀도 식당에 가도 여기저기서 일본어가 들려왔다. 


나는 대학에서 일본학(日本学)이 제1전공이었고 일본어능력시험도 JLPT N1급, JPT 800점대 점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에서만 선방 했을 뿐 회화실력은 형편 없었다는 것이다.


학과에 원어민 교수님이 한 분 계시기는 했지만 1주일에 3시간정도 밖에 안되는 회화 수업만으로 일본어 회화실력을 기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인 교환학생도 있긴 했지만 마주칠 확률도 적었고 특별히 친했던 것이 아니어서 말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일본어 회화와는 담을 쌓고 대학을 졸업 했고, 일본인 바이어 앞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미팅을 끝냈던 첫 직장에서의 트라우마가 남은 상태에서 일본 인턴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에 왔다고 일본어 회화가 당장 될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상대는 말도 빠를 뿐더러 발음도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시험 일본어와는 당연히 달랐다. 머릿속으로 일본어 번역 회로를 돌려가며 메모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의 말이 끝나고 난 뒤였다.


일본어 회화, 해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말이 너무 빨라서 잘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상대방에게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요청 해도 알아 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아 그대로 대리님께 양해를 구하고 전화 대응을 부탁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사실 쪽팔렸다.)


이 일 이후로도 전화벨이 울릴 때면 눈치를 보기 바빴고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일본에 온 이상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울렁증을 극복하고 당당히 일본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일본어 수기나 공부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스크린 일본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법은 단순했다. 일본어 드라마나 영화 대사를 듣고 따라하면서 익히는 방식이었다. 그동안은 눈과 손으로만 하는 일본어를 공부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입으로 일본어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방법은 찾았으니 교재만 고르면 되는 상황. 인턴이라고는 하지만 나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비즈니스 주제의 영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다 찾은 것이 은행원의 사투를 그린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였다. 영상은 유료 VOD 사이트를 통해서 볼 수 있었고 스크립트는 일본 드라마 대사를 공유하는 사이트에서 다운 받을 수 있었다. 


그날부터 출퇴근 시간은 입을 움직이며 달달달 따라 읽었고 (그러면서 외워졌다) 집에 도착해서는 이어폰을 꽂은채 음성을 계속 들었다. 어느정도 대사가 입에 익고 난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쉐도잉도 하기 시작했다. 총 10편의 드라마였는데 1편당 최소 100번 이상은 보고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이상이 지나면서 차츰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비록 한정적이기는 했지만 회사에 방문한 바이어가 미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드라마에서 익혔던 대사를 그대로 활용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비록 더듬 더듬 거리긴 했지만)


전화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전화를 받는 입장이 아닌 거는 입장이 되면서 부터이다. 회사에서 이따금씩 비품을 신청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2013년)는 전화나 FAX가 주류였다. 그래서 전화로 일본어를 말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비품 주문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하거나 또는 상품에 대한 문의를 했다. 사실 제대로 된 일본어로 말하고 있는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이해하고 원하는 피드백을 주는 것을 확인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어 회화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되었고 일본어 울렁증 또한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일본 거주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했으나 일부 편협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연재가 끝나면 브런치북으로 엮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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