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고쳐서 쓰는 거 아니다.” 술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흔한 연애 상담인 줄 알았는데 헐리우드 거장도 아는 이야기인가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한 줄로 요약하면, 사람 고쳐서 쓰지 말자는 거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두 사람, 아니 두 생명체가 있었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둘 중 한 쪽은 신비한 능력이 있는 괴생명체다. 아마존 원시부족이 공양까지 바쳤다는 ‘괴물’인데, 치유의 능력이 있다. 상처에 손을 대면 상처가 아물고, 현대 의학 최대의 난제라는 남성 탈모마저 손으로 해결해버린다. 하지만 유독 치유가 안 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여주인공 엘라이저의 목에 난 상처다.
엘라이저 목에는 아기 때 생긴 상처가 있다. 어떤 것에 긁힌 자국이 서너 줄 있는데, 상처가 왜 생겼는지는 본인도 기억하지 못 한다. 괴물이 손을 대도, 포옹을 해도 그 상처만큼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엘라이저인데, 괴물의 능력은 도통 그녀에게만은 통하지 않는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감독은 영화 말미에 가서야 설명해준다. 괴물이 함께 물에 빠진 엘라이저에게 숨을 불어 넣자, 목에 상처가 아가미로 변한 것이다. 물 속 생활을 하려면, 아가미는 필수다. 만약 괴물이 아가미를 치료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엘라이저는 수중생활은커녕, 변사체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을 거다. 사람 고쳐서 쓰는 거 아니다, 라는 고언을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에는 무언가를 고치려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장면들이 나온다. 새로 부임한 보안담당자 스트릭랜드는 손가락을 고치려한다. 그는 괴물을 고문하다가 괴물의 손에 물려 손가락 두 개가 잘린다. 엘라이저에게 건네받은 잘린 손가락들로 봉합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수술이 잘 된 것처럼 보였는데,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문제가 생긴다. 악취가 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손가락은 검정색으로 변해버린다. 검게 썩은 손가락을 스스로 뜯어서 버리고 나서야, 고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게 된다.
스트릭랜드가 억지로 안 되는 걸 고치려 노력했다면, 엘리자베스와 동거 중인 자일스 이야기는 조금 더 슬프다. 자일스의 이야기는 고쳐‘도’ 안 된다는 거다. 그는 화가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가 포스터 의뢰를 하면 작품을 그려 납품을 한다. 자일스는 경질된 회사에 다시 복귀하고 싶은 마음에 포스터에 심혈을 기울이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그의 예전 직장 상사는 멀쩡한 사탕 색깔을 고쳐오라 한다 거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한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상사의 말대로 포스터를 고쳐서 갔지만, 허사다. 이제는 사진의 시대라고, 말하는 상사의 말을 뒤로 한 채 돌아서는 자일스의 그림에는 ‘Future is here’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자일스가 생각한 미래는 이미 멀찌감치 사라진 후다.
자, 다시 처음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연인에게 고쳐야할 부분이 보여, 이야기했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 관계의 종말은 스트릭랜드의 검게 죽은 손가락처럼 결국 뜯겨질 관계다. 그렇다면 반대로 연인이 내 행동을 지적했을 때는 어떤가. 열심히 고쳐서 그 사람 앞에 가면, 이미 기차는 떠나있다. 연인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핑크빛 미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고쳐주려고도, 고치려고도 하지 말자.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랑의 모양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두 사람의 세계에는 꼭 필요한 아가미일지.
아 참! 엘라이저는 말을 못 한다. 농아다. 괴물이 엘라이저에게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치유의 기적도 행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은 물 속에서 살 테니까 뭐. 괴물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엘라이저의 신의 한 수가 수중에서 더욱 빛난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차기작에서도 사랑 이야기를 꼭 해주길 바란다. 아마 아카데미도 그걸 더 바랬나보다.
김형모
나는, 자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