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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Aug 12. 2022

화창한 날 아침에 듣는 깊은 슬픔

영화 <헤어질 결심>과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집중호우로 중부지방에 들이닥친 재해 소식으로 어수선하던 며칠을 보내고 오늘 아침은 거짓말처럼 화창한 날씨에 깊은 슬픔의 음악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을 듣고 있다. 여름휴가를 맞아 휴가지로 떠나고, 열심히 질주하는 삶의 소식들이 sns를 가득 채우고,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이는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릴 때 애써 웃음 지을 힘이 없을 때 외부로 향하는 에너지를 거두고 안으로 향할 때 그때가 바로 오늘 아침 같은 때이다. 너무 열심히 달려와 쉬고 싶은데, 쉬고 있는 나를 몰아치는 나와 대면하며 안절부절못할 때, 모처럼 해가 떴으니 창문을 열고 기운찬 음악을 틀고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말로 주문을 걸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할 때 말이다.   

   

 

Mahler Symphony No. 5 - Adagietto / Myung-Whun Chung NHK Symphony Orchestra 

    

이 곡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만났다. 작곡가 말러가 사랑하는 아내 알마에게 보낸 사랑의 고백, 혹은 존재의 슬픔을 그린 음악 등으로 평가되는 이 곡은 영화 전반에 짙게 깔린 정서와 닮았다. 애써 지탱하던 삶이 붕괴되며 찾아오는 달콤 쌉싸름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두 주연배우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쉽게 몰입이 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허용되지 않는 설정 때문이다. 둘 다 결혼한 자이고, 법이 허용하지 않는 살인이라는 방법이 사용된다. 남편을 죽인 살해 용의자 서래와 사건 담당 형사 해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영화 <헤어질 결심> 중 


영화의 느낌이 바로 오는 작품이 있고 오래오래 잔영이 남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이 후자에 속한다. 특히, 마지막 파도치는 바다에서 서래를 찾으며 애타게 부르는 해준의 장면이 그러하다. 유명세 때문에 보았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는 보고 나서도 그리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영화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그 이후로 박 감독의 영화는 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내 취향이 아니다 정도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연배우 때문에, 그리고 제목이 주는 호기심 때문에, 또 2022년 칸느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라는 명성 때문에 관람을 하게 되었다. 허용되지 않는 관계에서 불쑥 찾아오는 낯선 감정으로 인한 등장인물의 고뇌를 박찬욱 감독 식으로 풀어냈다. 역시 유쾌하지 않고 어둡다. 해결책이 없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서의 불편함과 유사하면서 다른 불편함이 생긴다. 기생충이 사회계층의 문제를 고발하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인간 실존의 한계, 무기력, 불가항력 앞에서의 절망감에의 고발이라고 할까.    

   

형사 해준은,


형사로서의 자부심이 있지만 삶에 활기가 없어 보인다. 직장 때문에 지방에 떨어져 사는 아내와는 주말에 만나지만 아내와 시간을 보낼 때도 영혼 없어 보이는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건조하고 무기력하고 무료한 일상을 자주 등장하는 인공 눈물을 넣는 장면이 대변한다. 

 

서래는, 


중국인이지만 독립군 할아버지가 개국공신 이어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여전히 이방인이다. 한국사회에 발을 붙이기 위해 필요해서였을까 여권국에서 일하는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폭력에 시달린다. 한국말도 서툴고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그녀는 정기적으로 노인들을 돕는 자원봉사활동으로 마음의 공허를 달랜다.      


해준과 서래는, 


살해 용의자와 담당 형사로 만났다. 남편 사망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아내 서래를 살해 용의자로 의심하며 감시하게 된다. 그러다 싹트는 묘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으로 자신의 자부심이었던 일에 씻을 수 없는 균열을 가져오는 실수. 한 사람의 사랑이 끝나고 다른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엇갈림. 시작되어도 진행될 수 없는 사랑이 선택하는 죽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굳이 이런 상황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기력한 상황에서 선택하는 죽음.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그래서 말러의 교향곡과 마지막 장면 파도치는 바다에서 서래를 애타게 부르는 해준의 절망적인 모습은 아주 닮았다.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과 함께 바다로 뛰어든 김우진은 삶과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물속에 다시 오르지 않기 위해 커다란 돌을 주머니에 넣고 스스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선택했다. 서래 역시 해준을 더 만나고 싶어 스스로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간다.   

  

깊은 슬픔. 신경숙 씨의 소설 제목이 떠오른다. 어쩔 수 없는 깊은 슬픔의 상황.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곳.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지막인 것 같은 그들의 선택은 오히려 삶에 대한 강렬한 절규이다. 살고 싶어서 선택하는 곳이다. 그래서 깊은 슬픔이다. 결핍, 상실, 단절의 시대에 전하는 만남의 이야기, 삶의 절규이다.   

   

오늘 아침에 이 음악을 듣고 있다. 슬픔이 저며 든다. 애써 기뻐하기보다 편하게 슬프고 싶은 아침에 서래와 해준을 생각한다. 심덕과 우진을 생각한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한다. 그리도 삶을 갈망했던 그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삶을 갈망하는 나를 바라본다. 슬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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