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서
비를 맞았다.
우산을 썼지만
비를 피할 마음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등에 맨 가방까지
옷에 물이 주룩주룩 흐를 정도로
흠뻑 젖었다.
젖고 싶었다.
폭우주의보 알리는 안전 안내문자 때문일까?
산책길 옆의 개천물이 불어
다니던 산책길이 잠겼다.
산책길 옆 꽃, 흙, 돌들도 다 잠겼다.
물잔치를 즐기는 두루미떼들은
아이들처럼 웃는다.
영화 그랑블루의 주인공은 물이 그리워 물속으로 들어간다.
채털리부인은 벌거벗고 비를 맞으며 초원을 달린다.
물 속에 녹아들고 싶은데
나는 여전히 소심하다.
몸의 반란으로 흔들리던 것은
몸 뿐 아니라 삶 그 자체
이유를 알 수 없이
벙어리처럼
꽁꽁 묶여있던 소리가
물과함께
흘러나온다.
내 창자에서
내 배꼽에서
내 머리카락에서
내 눈꼽에서
내 발톱에서
내 콧구멍에서
내 호흡에서
내 눈물에서
내 생명에서
의미없는 소리만 지껄이던
나는
허깨비였음을
비에 숨어
부끄러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