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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Sep 06. 2023

자기 자신으로 사는 기쁨

쇼펜하우어 행복론 2장


내면의 행복을 누리는 자의 대비 속물 (필리스터)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속물(snob)은 정신적인 욕구가 없는 인간, 정신적 향락을 누리지 못하는 인간을 일컫는다.  무료함을 이기려고 무도회, 연극, 사교, 카드놀이, 도박, 승마, 여자, 음주, 여행 등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부나 지위, 세력이나 권력으로 타인을 능가해 존경을 받으려는 마음이나 같은 부류 중 걸출한 사람과 교제해 그런 자의 후광을 즐기려는 마음을 갖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속물의 반대되는 내면의 행복을 누리는 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정신적 풍요      


인간을 이루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거론되는 명랑성, 건강, 아름다움과 함께 그것의 근원인 정신적인 감수성은 인간 행복 조건의 백미에 해당한다. 바로 이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속물의 반대 모습이다. 그리고 정신적 풍요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독립과 여가가 중시된다. 문제는 자유로운 시간을 사람들은 피한다는 사실이다.      


집에 있기 싫다며 종종 거대한 저택에서 나와 
바깥으로 달려가지만 금방 집으로 돌아간다, 
바깥에서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며. 
또는 불이 나서 불을 끄러 가는 것처럼 
급히 별장으로 말을 몰아 보지만 
문턱을 넘자마자 무료함에 하품을 한다. 
또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 싫다며 
잠에 빠져 자신을 잊으려 한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루크레티우스   



행복을 방해하는 두 가지 조건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방해하는 두 가지 조건으로 고통과 무료함을 지적한다. 궁핍과 결핍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초래한다. 궁핍과 결핍을 벗어나기 위해, 즉 풍족한 삶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족의 상태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한다. 그러나 궁핍이 채워지는 상태 즉 적절한 부, 권력, 명예를 가져 안전하거나 많이 가진 과잉상태가 되면 어떠한가? 풍족하다고 삶은 행복한가? 자본주의 사회라면 많은 부자들이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다. 굳이 부자가 아니어도 우리가 원하는 어떤 풍족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새 사람들은 무료해지고 다른 풍족의 상태를 혹은 다른 행복의 상태를 찾아 나선다. 따라서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는 궁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나머지 부류는 풍부해서 무료한 사람들.      


무료함의 원인으로 쇼펜하우어는 내면의 공허를 지적한다. 내면의 공허가 바로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들은 내면의 공허를 피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외적 자극을 갈망하게 된다. 반대로 내면의 풍요 즉 정신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무료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내면의 부가 충분해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거나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인간이 타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좁은 한계 내에서다. 결국 인간은 누구든 혼자다.    

『행복론』2장. 쇼펜하우어 

 

모든 일에서 각자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시와 진실』괴테       


우리 자신의 행복을 얻고 누리는 일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져 있다.

『나그네』 올리버 골드스미스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많을수록, 따라서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 것이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이러한 세상에 원래 지닌 것이 풍부한 자는 눈 내리고 얼음이 언 12월 밤에 밝고 따뜻하며 흥겨운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과 같다.      

『행복론』2장. 쇼펜하우어




정신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      


그렇다면 이런 정신적 풍요를 누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독립과 여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외부에서 자극을 얻을 필요가 없기에 독립적이고 불필요한 것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기를 선택하기에 개인적인 여가가 확보된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면의 공허함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꾸 외부로 향하며 자신을 바쁘게 몰아간다. 게다 나이가 들면 외부에 의존하던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해서 나이가 들수록 내면의 정신력이 더욱 중요하게 요구된다. 

 

인간의 힘이 발현되는 근원에서 행해지는 놀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각 사람마다 자신의 내면에 우세한 힘이 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재생력과 관련된 향유이다. 먹고 마시기, 소화, 휴식, 수면 욕구가 이에 속한다. 둘째는 육체적 자극과 관련된 향유이다. 산책, 뜀박질, 레슬링, 무용, 검도, 승마 및 각종 운동 경기와 심지어 사냥이나 전투, 전쟁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정신적 감수성과 관련된 향유다. 탐구, 사유, 감상, 시작, 조각, 음악, 학습, 독서, 명상, 발명, 철학적 사고 등이 이에 속한다.  사람마다 진정한 자신의 힘이 발현되는 근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 힘을 이용할 때 얻어지는 향유가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진다. 향유란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얻어진다. 


평범한 사람은 인생의 향유에 관련해 자신의 바깥에 있는 사물, 즉 소유물이나 지위, 여자와 자식, 친구나 사교계등에 의존한다. 그가 느끼는 인생의 행복은 이러한 것에 의해 지탱된다. 그 때문에 이 같은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이 같은 것에 환멸을 느끼면 인생의 행복은 무너지고 만다. 이런 관계는 무게 중심이 그의 바깥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소망이 계속 달라지고 기분이 변덕스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재력이 허용하는 경우 별장이나 말을 사고, 잔치를 열거나 여행을 가는 등 호사를 누리는 것은 어디서든 외부에서 만족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과 체력의 참된 원천이 자신의 생명력에 있음에도 몸이 쇠약해진 사람이 걸쭉한 고기 수프나 약제로 건강과 체력을 회복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행복론』2장 쇼펜하우어

   

결국 정신의 탁월성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참된 부는 영혼의 내부에 있는 부일뿐이고, 다른 것은 모두 이득보다 불행을 안겨준다. 

『명작론』12. 루키아노스 


정신적인 풍요를 위해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갈고닦아 매일 매 순간 자기 자신으로 사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자유로운 여가이다. 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유로운 여가를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 다니기 바쁘다. 


행복이란 여가에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행복한 삶이란 아무런 방해 없이 유능함을 펼칠 수 있는 삶이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재능을 받아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그 재능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괴테                 



역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면 헤겔의 정반합正反合 변증법이 적용된 부분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합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떨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더 형편없는 상태로 추락한 것 같기도 하다. 인간 삶의 다양한 카테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근원적인 행복을 지향하는 종교가 타락하고, 사회의 건강한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온갖 노력도 부패하고, 바른 통치를 지향하는 정치가 부패하고, 교육기관도 제 기능을 상실하는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보면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지 질문이 생긴다. 외부의 것을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정신적인 풍요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의 온갖 복잡한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복잡해지는 문제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각 개인이 내 행복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이 온갖 엉클어진 사회의 온갖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 종교기관, 사회, 국가 더 나아가 세계, 지구환경까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곪아 터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쇼펜하우어의 관점에 따르면 나 역시 속물이다. 씁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을 외부에서 찾으려 했고, 변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방식으로 살아왔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 여가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가지고 있거나, 사람들의 인식에 바탕을 둔 자산이 아닌, 나를 이루고 있는 고유의 정신, 힘에 집중한다면, 독립적으로 여가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설득당하고 있다. 다른 많은 질문들보다 우선적인 질문, 언제쯤이면 진짜 나로 살 수 있을까? 그 질문을 하며 책과 함께 씨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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