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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Jan 16. 2022

물이 커피가 되는 기적

      

커피가 떨어졌다. 낭패다. 하루의 시작을 커피와 함께 하는 나로서는 커피가 떨어진다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과 다를 바 없다. 그득하게 쌓아놓고 있던 건데 방심하는 사이 어느 날 똑하고 떨어질 때가 있다. 건강을 위해 믹스커피에서 원두커피로 갈아탄 이후 콩을 구입해서 집에서 갈아먹는데, 가는 것도 그때그때 갈면 좋지만, 꽤 번거로운 일이어서 한꺼번에 갈아 냉동 보관해서 먹는다. 고유의 향을 양보해야 하는 면이 있지만 귀차니스트인 나로서는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러다 향이 많이 그리우면, 바로 갈아 제조한 드립 커피를 사서 하나씩 내려먹기도 한다. 어쩌다 모닝 루틴이 된 나의 커피타임. 그런데 그게 뚝 하고 떨어졌다.

     

주문한 커피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문제가 된다. 급한 대로 드립 커피를 사놓기를 아들에게 부탁해 놓고 외출을 했다. 들어오는 길에 마침 원두가 눈에 띄어, 갈지 않은 원두를 한 봉지 사 왔다. 원두를 갈기 전이라도 당장 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가는 날이 장날인지, 드립 커피 매장이 휴무라 드립 커피를 못 샀단다. 커피 사면서 초밥 사 와서 먹겠다고 해서 카드를 내밀었던 참이었다. 사온 초밥을 맛나게 먹고 있는데... 어휴, 맛나게 먹고 있는 죄 없는 아들한테 원망의 언어가 마음에서 쏟아진다. ‘그럼 나한테 미리 전화라도 해줬으면 올 때 갈아놓은 원두를 사 왔을 텐데. 당장 커피를 못 마시잖아....’살짝 원망이 생긴다. 그렇다고 당장 원두를 가는 것은 귀찮고.   

   

어쩔 수 없다. 그냥 믹스커피라도. 아니야, 믹스는 아니야. 괜히 군것질을 해대었다. 저녁에.    

  

아침이 되었는데, 슬프다 커피를 내릴 수 없다. 아침부터 콩을 가느라 부산을 떨고 싶지는 않고, 그냥 따뜻한 물을 마시며 커피 허기를 채운다.   


   






커피를 마시는 심리는 여러 가지다. 커피 그 자체의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함은 물론 제일 중요한 점이다. 커피의 맛은 원두커피를 직접 갈아 내려마시면서 느끼기 시작했는데, 종류에 따라 고유의 맛이 있다.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커피를 마시는 순간 내가 갖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크게 작용한다. 일종의 도피처이다. 하필 커피가 떨어진 이 순간 나는 도피처가 아주 필요한 순간이다. '내가 한 행동이 옳았던가?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누군가 날 비난하는 것 같아. 모처럼 용기를 냈는데 상대로부터 싸늘한 반응이 오는 것 같아. ' 뭐 살다 보면 이런저런 마음이 갈라지는 소리들이 내면에서 들린다. 그럴 때 커피 한 모금이 몸에 들어가면 그 소리들을 살짝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나만 외톨이 같아. 내가 더 잘해야 하는가?.... 용기가 안 생겨. 잠이나 퍼질러자야겠어...'  오늘따라 더 커피가 고프고 있었다.      






요한복음 2장에는 갈릴리 가나의 결혼식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 묘사되어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중요한 자리에 그 지역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포도주가 갑자기 떨어졌다. 이런 낭패가 있을 수가! 예수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제자들도 하객으로 참석한 곳이었다. 아마 예수와 꽤 가까운 사람의 결혼식이었나 보다. 남의 일 같지 않으니 당연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걱정이 된다. 익히 예수의 남다름을 알던 그녀는 이 곤란한 상황을 예수에게 알린다. 예수의 반응은 어땠을까? ‘물을 항아리에 채우세요.’ 하인들은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예수의 말대로 물을 항아리에 채워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늦게까지 좋은 포도주를 둔 신랑을 칭찬하게 된다. 대략 물이 포도주가 되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 이야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점은 포도주가 없어, 밖에서 포도주를 구해온 것이 아니라, 물을 채우라고 한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해결책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점으로 볼 수 있다. 예수는 물을 채우라고 했고, 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물을 채웠다. 그리고 그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어쩌면 해결책이 내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 커피를 부르는 신호는 많은 경우에 내면에 불편함이 있을 때다. 이번에도 그랬다. 커피가 꼭 필요한 순간에 커피가 떨어졌다. 커피를 제시간에 공수하는데 차질이 생겼다.  내 아침의 귀한 시간이 허물어진 것이 마치 누구의 잘못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잘못도 없는 아들을 향한 작은 원망이 신호탄이 되어 어딘가 숨어있던 소리들이 불쑥불쑥 재재거린다. 그렇게 시작되는 전쟁터에 인해전술人海戰術처럼 까마득히 저 산 어귀에서  병사들이 몰려온다. 온갖 비난의 총천연색 깃발을 펄럭이며 달려든다.



⌺ A가 바뀌어야 해!

⌺ B는 너무 이기적이야!

⌺ C는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      



커피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 안의 병정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내 안의 물을 채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안의 침입자들, 그 병정들을 잠재우거나 몰아내는 것이다. 병정이 없는 원래의 상태로 돌이킨다는 뜻이다. 나의 물로 가득 우면 까마득히 몰려오던 병정들은 물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시끄러운 소리들은 잠잠해진다. 물이 가득 찬다. 고요가 온다. 내 속에 커피를 부르며 떠는 마음이 잔잔해진다. 병정들은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물로 채워 포도주가 되는 신비는 갈증이 사라지는 과정의 신비다. 무엇인가를 부르는 갈증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필요한 그것이 이미 이 자리에 도래했다는 의미 아닐까.   

   

커피를 마시지 않았는데, 그저 한잔의 물만 커피잔에 따라 마시는데, 커피를 부르던 그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커피를 부르던 마음이 사라졌으니, 이미 커피를 마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은 커피가 되었다.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이제야 비로소 커피콩을 갈아서 진짜 커피맛을 느끼고 싶다는 차분한 생각이 든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부엌에서 커피콩을 갈고 있으니, 천사의 소리가 들린다. ‘커피콩 어떻게 갈아요? 내가 해줄까요?’ 커피가 고프나 콩을 갈기는 싫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천사의 등장. 기분 좋게 커피콩을 가는 법, 기계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금방 간 콩으로 내린 커피! 방으로 들어와 혼자 음미한다. 진하고 맛나다. 밖에는 갑자기 나타난 천사가 커피콩을 갈고 있다. 물이 커피가 되는 기적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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