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글을 쓰고 나면 발행을 하기 전에 멈칫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발행을 빨리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특히, 내 마음에 드는 글일수록 빨리 발행하고 싶어 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명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가까운 사람, 나 같은 경우에는 가족에게 슬며시 글을 보여주며 객관적인 평가를 요청하다.
음, 좋아!
괜찮은데요~
그런 말 말고!
좀 더 세밀하게 읽는 사람은 친절하고 아픈 피드백을 구체적으로 해준다. 고맙기 그지없다.
좀 더 묵혀놓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묵힌다....
일상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론될 수밖에 없다. 사생활이라 아주 조심스럽고, 당사자가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고, 내 시선과 당사자의 실체와의 괴리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을 꺼려할 수도 있다. 해서 나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일상 에세이를 쓸 때는 등장한 인물에게 글을 보여주고 허락을 구하는 편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일상 에세이를 쓰는 것과 관련한 고민이 많다. 다 드러내기도 곤란하고, 드러내지 않으려니 전달의 부분이 매끄럽지 못하다. 글쓰기 초보라서 느끼는 부분일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픽션에 해당하는 소설에 관심이 간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브런치 작가님들 중에서도 소설을 쓰시는 분들을 그래서 나는 동경한다.
얼마 전에도 쓴 글을 발행 직전에 멈추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아직 발행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글이 발효 중이다.
발효 fermentation의 사전풀이를 보면, 발효는 효소작용에 의하여 유기물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대사 과정이다. 생화학에서는 발효를 제한적으로 산소 없이 탄수화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식품을 생산하는 관점에서는 유기물을 화학반응으로 생활에 유용한 음식이나 음료를 만드는 미생물의 활동이라고 넓은 의미로 정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리해보면, 발효는 미생물의 활동에 의해 유기물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다. 예컨대, 김치를 담아 오래 두면 숙성의 과정에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로 처음과 전혀 다른 맛으로 변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집에서 자주 하던 방식인데 우유에 유산균을 넣어 적당한 온도에 일정한 시간 두면 발효의 과정을 거쳐 맛있는 요플레가 된다. 빵도 마찬가지다.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어 반죽해두면 부풀어 맛있고 먹기 좋은 빵으로 등장한다. 모두 미생물에 의한 화학적 변화, 발효를 거친 일상의 예들이다.
글은 생명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을 쓴 시간이 많지 않지만 짧은 기간에도 글을 쓰면서 마치 생명체처럼 살아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았다. 쓰다 말고 넣어 둔 생명체인 글은 무생물처럼 그대로 있지 않는다. 서랍 안에서 글은 고정체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생물체의 활동에 의해 화학적 변화가 생긴다. 글의 성질이 변한다. 묵혀두는 동안의 시간, 글 쓰는 이의 사유, 경험에서 일어나는 온갖 미생물이 글에 화학변화를 일으킨다.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의 표현이 필요할 때 , 당장 글이 진행되지 않을 때는 김치를 저장하듯 묵혀두면 어떨까 싶다. 글은 마치 된장이 발효되듯, 이스트 작용으로 빵이 부풀어 오르듯, 온갖 경험, 사유, 시간과 씨실 날실처럼 얽혀 숙성된다. 냄새가 변하고, 모양이 변하고, 부풀어 오르기까지 한다. 어떨 때는 해체되고 재조립되기도 하고 재탄생되기도 한다.
어떤 글은 이렇게 오래 묵혀 두고 숙성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글 서랍에 완성되지 않은 채 놓여있는 글들을 애정 한다. 그들은 지금 발효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