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가 여주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 콘셉트 별로” “지금 시대에 여성 총리가 ‘취집’으로 황후를 꿈꾸나.”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더 킹: 영원의 군주’(SBS 금ㆍ토 드라마) 갤러리에 게시된 글의 일부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에 의존하는 듯한 전개 방식에 불만을 드러낸 의견들이 적지 않다.
중앙일보 기사 2020-05-05 유성운 기자
히트 제조기로 통하는 김은숙 작가가 2020년 당시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주목받았지만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던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와 관련된 기사문이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배우 김고은 씨가 출연한 작품이라 기대감을 갖고 첫 부분을 보다 심드렁해지고 말았는데, 기자는 호응을 얻지 못하는 여러 가지 요인 중 하나로 바로 여자 주인공들의 시대에 맞지 않는 수동성을 주목하고 있다.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반면에 기자는 이어, “지난해 흥행에 성공한 ‘사랑의 불시착’의 경우엔 북한을 주요 무대로 삼은 독특한 설정에, 여주인공이 상황을 스스로 끌고 가는 캐릭터라는 점이 긍정적 효과를 일으켰다. ‘백마 탄 왕자’ 같은 전형적 멜로와는 결이 달랐다”라는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의 설명을 덧붙였다.
'사랑의 불시착'은 제목을 보고 신파조의 그렇고 그런 드라마려니 했다가 북한이라는 무대의 신선함과 함께 등장인물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가 상당히 인기를 끌며 높은 시청률을 보였는데, 이는 여주인공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의도치 않게 북한에 불시착한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풀어가려는 태도가 많은 젊은 세대에게도 어필이 되었던 모양이다.
유사한 예로, 기자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연뿐 아니라 조연들까지 ‘청순가련형’과는 거리가 먼 유능하고 주체적인 캐릭터라고 기술한다. 아마 이런 유의 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여자 주인공들의 캐릭터 변화
드라마든, 영화든 대중과 함께 하는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시대와 함께 가지 못하는 작품들은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중의 심리가 절대선絶對善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을 이루려는 분투, 그리고 갈망이 좌절될 때의 낙담 등 다양한 현실의 모습이 예술작품의 형태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 현실을 대신 겪는 등장인물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자신을 대신해서 난관을 뚫고 나가는 인물에 박수를 보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 면에서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 작품들은 시대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은 더 이상 청순가련형으로 하염없이 해바라기처럼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의 모습이 아니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자기 인생을 책임질 줄 아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를 보고 전혀 어린아이들만을 위한 작품이라기보다 어른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무엇보다 여자 주인공 엘사의 적극성이 인상적이었다. 겨울왕국뿐 아니라 뮬란 역시 대표적으로 여자 주인공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러다 보니 아주 오래 전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여자 주인공들이 너무 답답해서 보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 와 뮬란
시대의 변화뿐 아니라 세대 간의 변화가 적지 않다. 성性역할이 많이 교차되고 있고, 여성들도 이전에 비해 사회진출이 많아져 주체적인 특성을 보인다. 나의 딸들만 해도, 내가 젊었을 때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갈등도 많았지만, ‘내 딸이 아니고 제삼자 입장이라면 참 멋진 녀석들이다 ‘라는 고백을 절로 하게 된다. 내 딸이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관습이라는 틀 때문이다. 내 나이 때 사람들만 해도 ’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라는 범주를 철옹성같이 지키려 한다. 예컨대 나이와 그에 걸맞은 사회적인 성장과 변화 같은 것 말이다. 졸업을 하면 취업을 하고,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는 식의 뻔한 스토리 말이다.
젊은 그들을 보면 겁이 없다. 무모하기까지 하다. 저돌적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다. 대조적으로 나는 백마 타고 오는 왕자를 마냥 기다리다 나이가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왕자가 꽃을 갖다 주고, 왕자가 옷을 사주고, 왕자가 멋진 곳을 구경시켜주고, 왕자가 내 삶을 책임져 줄 것이다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내 행복을 남에게 부탁하던 시대는 그만
'로맨스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있다. 신혼부부로 기억되는데, 남자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고백한다.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이다. 충격적인 말을 듣고 아내가 ‘그럼, 내 행복은?’이라고 질문하자, 남편이 하는 말,
네 행복을 내가 왜?
아내의 입장이 바로 신데렐라 콤플레스의 전형이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신드롬이다. 그 장면에서 나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왜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자신이 직접 책임지지 않을까? 이유를 살펴보자면 이야기는 길어진다. 개인의 몫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이유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