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한 나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일단 책이 너무 못 생겼다. 서점에서 만났다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비주얼.
읽고 나니 표지 디자인에 의문이 더 가득해진다. 에우리지시인가? 보이는 모습(외관)에 치중하는 삶이지만 결국에 보이지 않는(조명되지 않는) 삶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 모임에서 대부분 털어놓았으므로, 바로 모임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이 책의 선정 이유
마르타 바탈랴의 「보이지 않는 삶」을 택하게 된 이유는 우리 모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세계들>이어서가 가장 컸다. 한정된 독서 리스트에 책을 골라 넣는 만큼 한 권을 넣으면 반대로 한 권의 책을 덜어내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느끼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이 책과 한 자리를 두고 고민한 작가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였다고 한다. 마르타 바탈랴(1973~), 클라리시 리스펙토르(1920~1977)는 연배는 다르지만 모두 브라질 여성 작가다. 마르타 바탈랴를 읽어서 좋았던 점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브라질 현시대에 촉망받는 작가는 어떠한지를 느껴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나는 개인적으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대한 극찬을 주변에서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나중에 「달걀과 닭」이나 「G. H. 에 따른 수난」은 꼭 읽어보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인상
인물 중심의 전개로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슬퍼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래의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착잡하게 읽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각각을 조금씩 조망하면서 나아가는데, 이야기 속에서도 배제되는 인물과 포함되는 인물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나는 이 이야기가 오로지 에우리지시의 이야기로 느껴졌지만 이야기 속에서도 소외받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뛰어난 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이 책은 재미있다. 이 작가가 인물들의 기분, 심리 등 내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이 좋았다. 작가는 심리 상태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인물들이 변화한 행동들을 세심히 묘사하여 그들의 내적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예를 들면, 슬픔에 대해서 말할 때 그냥 '슬프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슬픔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 인물이 겪는 슬픔의 깊이와 영향력을 독자들이 충분히 체감할 수 있게 해 준다.
브라질
브라질 소설로는 우리 모임에서 처음 읽는 작품이었는데(잘 알려진 브라질 작가로는 파울로 코엘료가 있다.) 브라질이 잘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낯선 음식의 이름들, 지명, 음악들 말고는 이 소설의 배경이 브라질이라는 걸 느끼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현대화를 겪으면서 글로벌 표준화된 우리들 삶을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 함께 성찰했다. 마치 오리엔탈리즘처럼 우리도 다른 세계에 어떤 환상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 소설에서 맡았던 브라질의 냄새는 이런 것들이었다. 에울랄리아(기다의 시어머니)의 죽음을 그린 장면에서 나오는 데자피나두(Desafinado)라는 보사노바 음악. 에우리지시가 이사 갔던 동네, 이파네마에 대한 설명. 이파네마라는 곡명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 동네가 사실은 예술가들과 상류층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상상 속 이파네마는 사람이 거의 없이 야자수들만 늘어서 있는 조용한 바닷가였는데 말이다.
에우리디케
중훈님이 에우리지시 구스망(Eurídice Gusmão)의 이름을 그리스 신화의 에우리디케(Eurydice)에서 따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신화에서는 에우리디케보다는 남편 오르페우스를 조명하지만, 이 책에서는 에우리디케를 더 많이 보게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고 덧붙여 주셨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는 이렇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하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찾아간다. 그는 죽은 에우리디케를 살려달라 음악으로 청한다. 음악에 감명받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에우리디케를 돌려주는 대신 '뒤돌아 보지 말라'는 조건을 단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알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출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결국 뒤를 돌아보았고, 에우리디케는 저승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에우리디케와 에우리지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자꾸 뒤돌아보는 남편을 가졌다는 점이다. 오르페우스는 두 번 뒤돌아 본다. 에우리디케를 잊지 못해 과거를 뒤돌아보고,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는지 궁금해서 또 한 번. 에우리지시의 남편은 에우리지시와의 첫날밤 이후, 그녀의 처녀성에 대한 의문으로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과거를 찾아 뒤를 돌아본다. 그녀들은 모두 (남편)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외인으로 인해 삶이 결정되어 버렸다는 점, 자력으로 자신을 구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슬픈 인생...
불편한 위계
이 소설은 가정에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여성들 삶에 대해 말한다. 그 삶은 얕잡히고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이 매우 불편했다. 소설 속 히로인 에우리지시의 '특별함'을 '평범한 여성'들과의 비교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마치, 바깥 노동이 가정 노동보다 가치가 높다는 전제 위에서 사회로 나아갈 여성, 조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성들이 가정에 사장되어 있다는 뉘앙스로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위계(가정/사회 사이의 위계, 능력에 따른 사람 사이의 위계)에 반대하는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묘한 우월감이 느껴져서 질색해가며 읽었다. 그래... 에우리지시... 너 잘났다... 근데 어쩌라고...
그럼에도 안타까운 에우리지시
앞서 밝힌 불편함과 별개로, 그럼에도 우리의 에우리지시의 삶이 딱하고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해보고 싶은 걸 해보고, 잘하고 못하는 지를 알게 될 정도는 해보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 에우리지시는 자신의 한계를 경험해볼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아야 했다. 에우리지시가 열심히 쓴
결말
결말에 관해서, 결국 에우리지시가 어떤 글을 썼는지 그 글에 대한 결과는 어땠는지 참 궁금했다. 그가 쓴 글의 결과야 사실 불 보듯 뻔하다. 무언가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 소설이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에우리지시는 어떤 글을 썼을까? 나는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를 완성시켜줄 최종적인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까지 가서도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열린 결말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편인데, 이 소설의 결말은 열어둔 결말이라기보다는 닫지 못한 결말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내가 되는 삶
작품 속에서는 '에우리지시가 에우리지시가 아니기를 바라는 에우리지시의 일부'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나의 일부가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부분의 이야기가 나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더울 때는 시원한 데서, 추울 때는 따듯한 데서 일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목소리', 'K장녀', 'IMF를 겪은 부모님의 조언' 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육체 노동이 근간인 '농사'를 짓는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왔고, 나 또한 K장녀, IMF 키즈로 살아왔지만 나에게는 이 중 어떤 것도 나의 정체성을 한계 짓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참 신기했다. 정말 다양하고 다른 인생들이 있구나, 실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혁중님은 직업적 성취가 꿈이 되는 세상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신다고 하셨는데, 정말 공감하는 바이면서도 내 스스로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의문하게 되었다.
다음 모임
다음 모임에서는 연말에 기획하고 있는 meet-up을 조금 더 구체화해보기로 했다. 온라인에서, 책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즐거운 상상으로 이번 모임에 대한 글은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