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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Nov 08. 2022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피땀,「군터의 겨울」

우리들이 속한 세계, 우리들이 닿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

여름에서 겨울로

마지막 출장에서야 발견한 멋진 로스터리 커피숍, Chadajima

「군터의 겨울」을 읽기 시작했던 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였다. 3주 간의 출장이 마무리하고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보이지 않는 세계들>의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도저히 한국에 돌아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란 생각에, 출장 짐을 쌀 때 이 책을 소중히 챙겨갔더랬다. 더운 나라에서 읽기 시작해서, 한창 겨울이 문 두드리는 때의 한국에서 책을 덮을 것이라 상상하니 이 분주하고 닻 없는 출장 생활이 오히려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군터의 겨울」은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통해서 함께 읽기로 한 여덟 권의 책 중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이었다. 가장 알지 못하는 나라, 파라과이의 작가의 책이었고, 작가 후안 마누엘 마르꼬스는 국내에 소개된 유일한 파라과이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한 점이 많았다. 알렙, 이 작은 출판사는 어쩌다가 중남미의 많은 작가 중에서도 파라과이의 작가 책을 골라 세상에 내놓게 되었을까? 조구호 교수님이 이  책을 골라 번역하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작가 마르꼬스는 미국에서의 대학 교직을 버리고, 파라과이로 돌아가 무엇을 보았을까? 그걸 책을 통해 읽을 수 있을까?


한국의 겨울을 만끽하기 위한 아이스크림, 펠앤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작은 호기심들은 책을 다 읽고서도 풀리지 않았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기에 너무 학식이 짧다고 느꼈다. 「군터의 겨울」은 낯선 세계의 이야기와 만나는 일은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통감하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 속 이야기를 어루만지기에는 너무 낯설었고, 그래서 어려웠고, 또 그래서 진하게 느낄 수 없었다. 나의 얕은 감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들었던 모든 노력만큼은 확실하게 음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올 것이었다.



세 사람의 모임


돌아온 노랑

오늘로 벌써 여섯 권째를 맞이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들>의 모임 중 가장 적은 인원이 모인 날이었다. 열음님과 노랑님, 그리고 나, 총 세 사람이 모였다. 그래도 기쁜 점이 있다면, 아시아 모임을 함께 했던 노랑님과의 재회였다. 아시아 모임에서 감상을 나눌 때 언제나 책이 주는 감동과 지식의 진폭을 넓혀주던 노랑님이었다. 잠시 모임을 떠나 계셨었는데 그간은 책 출간(「해외생활들」, 이보현, 꿈꾸는인생) 때문에 바쁘셨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다시 뵙게 되어 오는 반가움과, 계속해서 함께 읽을 책들이 늘어감에 큰 기쁨에 잠시간 근황을 나누었다. 


다 못 읽었어요.


이것은 바로 내 이야기. 모임을 했던 날까지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열심히 읽어보려 했건만, 쉽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서 모임까지 하루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피로에 굴복해서 하루 온종일을 실신해 있느라 백여 쪽을 읽지 못한 채로 모임에 참여했다. 오늘 나는 몇 마디나 할 수 있으려나. '에휴, 다 읽지 못해서...'라는 나의 소심한 변명에 '다 읽고서도 잘 모르겠으니 괜찮다'는 너스레가 돌아왔다. 


너무 어려웠어요.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이 책은 어려웠다. 기한 내에 다 완독 하지 못한 것에 이렇게 위안이 되는 말이 있었던가. 책이 어렵단다.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이 책은 낯설어서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둘째, 이 책은 구성과 문장이 난해하다.

이 두 가지 난점에 대해서 하나씩 짚어보기로 한다.


낯설어서 현학적인

새로운 이름이 나올 때마다 붙이다 포기한 플래그

이 책은 정말 많은 실존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호명한다. 그중 우리가 알만한 인물이나 사건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새로운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플래그를 붙여놓고는 그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도, 플래그도 포기하게 되었다. 모르는 이름들로 점철되어 있어 현학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을 불러대는지 가끔 아는 이름이 나오는 횡재를 누리기도 했다. (!) 지난 모임에서 읽었던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에서 등장했던 빅또르 하라나 빠블로 네루다가 등장했을 때엔 '꺅'하고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흡사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달까. (➡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와 관련된 브런치 글) 내가 아는 사람이 드디어 호명되다니! 하면서 어찌나 반갑던지. 그리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급된 모든 인물과 사건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나 메시지와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자주 쓰이고 주요한 장치에 무지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들'을 다 샅샅이 찾아 읽어야 할 이유다.


난해한 구성과 문장


이 소설은 인지할 수 없는 순간에 장면을 전환하거나, 중간중간에 다른 종류의 텍스트가 삽입하는 등 구성이 매우 불친절하다. 혹자는 난삽하다고 혹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고딕체로 삽입된 텍스트들을 해석해내는 데 늘 실패를 겪었다. 대체 무슨 의미인지...?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그 의도를 꿰뚫기에 나의 학식이 부족한 탓이라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구성뿐이 아니라 문장들도 매우 골치를 썩인다. 나는 이것을 마르꼬스의 특징적 문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한국어와 스페인어 사이를 벌려 놓는 커다란 언어적 시스템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페인어 문장의 구조, 서술의 방식은 한국어와 확실히 다르다. 스페인어 화자들에게는 단어의 꼬리를 물어가며 새로운 문장을 이어나가는 구조가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겠지만,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한국어 문장의 꼬리는 늘 서술어이기 때문에, 더 물고 늘어질 수가 없다. 스페인어의 문장은 손쉽게 길어질 수 있으며, 한국어와는 상이한 어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다란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옮기다 보면 두 가지 중 하나가 훼손되고 만다. 스페인어 원문의 유려한 긴 문장이 짧게 끊어지거나, 스페인어 원문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정보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다. 짐작컨데,「군터의 겨울」은 원문의 호흡(길이)을 살리는 선택을 했던 것 같다. 때문에 독자로써는 원문과는 상이한 순서로 제시되는 정보를 긴 호흡으로 따라 읽어야 하기에 정보처리에 있어 큰 품을 들게 된다. 독자로서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엑소포니 문학


노랑님이 다와다 요코, 밀란 쿤데라, 슈테판 츠바이크를 예를 들어 엑소포니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사실 이 날 노랑님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용어였다. Exophony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작품을 저술하는 활동이라고 나온다. 대부분 이주, 망명, 전쟁 등으로 인한 난민과 이주민들의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게 대표적으로 떠오른 작가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아고타 크리스토프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저술을 한다는 것이 불러오는 감정적 상태를 정확하게 나타낸 문장들 몇 개를 소개한다. 엑소포니 문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내 감정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 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중략)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중략)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작가 마르꼬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직에 있다가 1989년 조국 파라과이에 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수직을 사임하고 파라과이로 돌아온다. 「군터의 겨울」은 그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쓰였기에 엑소포니 문학으로 분류될 수는 없겠으나, 마르꼬스가 미국에서 교수직을 지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그에게 강요된 외국어를 말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시기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그 고통이 그를 파라과이로 부른 많은 힘 중 하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꼬스는 누구인가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군터나 솔레닷에 자신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군터의 인생은 작가 마르꼬스의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 군터는 세계은행 총재의 자리를 버리고 조국으로 돌아가며, 마르꼬스는 미국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귀국했다. 군터는 솔레닷을 구출하고 싶어 했지만, 좌절되었고 마르꼬스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며 수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반면 솔레닷은, 어리지만 강단 있는 소녀로 원주민 신화의 푸른 재규어를 상징하는 인물로 나온다. 마르꼬스가 이 작품을 여러 차례 고쳐 쓰며 후반기에 가서 새로 창조한 인물이라는 데 그 특이점이 있다.


마르꼬스는 이 작품을 왜 이렇게나 여러 차례 새로 썼을까? 이미 한 번 출간된 작품을 다시 고쳐 쓴다는 것은 작가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다. 그런데도 새로 쓴 데에는 이 소설에 그의 인생과 그의 파라과이 그 자체를 담고자 했기 때문이 크지 않을까? 외지(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보고 전해 듣던 파라과이와, 모든 걸 버리고 다시 되돌아온 파라과이의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것이기에 그에 맞추어 소설은 수정되고 덧붙여졌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과연 군터와 솔레닷, 그 둘 중 마르꼬스는 누구인가? 우리는 둘 다라는 답을 내놓았다. 마르꼬스 자신이 벌인 투쟁의 화신인 군터와, 자신이 될 수 없었던 파라과이의 빛과 희망, 그리고 희생양 솔레닷, 그 모두에 자신의 경험과 염원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여담인데, 군터(Gunter)는 독일에서 매우 흔한 성씨라고 한다. 그리고 솔레닷(Soledad)은 스페인어로 '고독'을 의미한다. 마르꼬스는 이런 작명도 게으르게 하지 않고 의미를 담았을 것만 같은데. 알 것 같기도 하고.


범인은 누구인가


범인은 정말 앨리사였을까? 추리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범인이 누구냐보다도 범행의 동기와 범행을 위한 트릭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아쉽게도 범인은 앨리사였다고 지목은 하지만 끝까지 그 동기와 방법을 말해주지 않는다. 진실은 지정될 뿐,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파라과이의 현실을 반영한 결말인 걸까?




관련 글

빅토르 하라와 파블로 네루다가 궁금하신가요?

https://brunch.co.kr/@hnote/91


관련 책 

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 (절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https://ridibooks.com/books/432100013

이사벨 아옌데, 「바다의 긴 꽃잎」,  https://ridibooks.com/books/509001617

후안 마누엘 마르꼬스, 「군터의 겨울」, http://aladin.kr/p/ZJG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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