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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Apr 10. 2023

모래알 조직에서 두꺼비집 짓기, 냅다 동호회 가입부터

이직 후 조직 적응 첫걸음

실무 투입 직전의 조바심

3개월 간의 교육장이 되어준 회의실에서. 과음 후.

입사 후 3개월 간의 교육이 끝났다.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 한자리 앉아 강의를 듣고, 여섯 시 이후로는 나머지 공부를 하는 생활이었다.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게 된 만큼, 교육이 끝날 때쯤이면 채워지고 풍족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부족함에 몸 둘 바 모르겠고, 이대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막막하기만 할 뿐. 낮이고 밤이고 조바심이 일었다.


이때 내가 해야 할 건 뭘까. 공부? 이미 3개월을 풀타임 공부한 사람으로서, 공부는 답이 아니란 걸 마음 깊이 느끼고 있었다. 글자나 읽고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야, 이건. 직접 부딪혀가며 일해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전 직장은 모래밭


다년간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해 오면서 느꼈던 조직의 특성이 있다. 사람들이 모래알 같다. 작고 단단한 모래알. 한 알 한 알 매끈해서 뭉쳐지지 않고 제 갈길로 줄줄 흘러간다. 모두들 한결 같이 나이스하고, 똑똑하고, 훌륭한데 때로는 말할 수 없이 냉엄하다. 


일례로 몇 컨설턴트가 팀을 이루어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치자.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은 하나의 모래성 쌓기에 전념한다. 성을 쌓는 동안은 어떻게든 좋은 얼굴로 영차영차 한다. 누구 하나 저버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포용해서 고지까지 끌고 간다. 서로 손가락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니까. 하지만 프로젝트가 무사히 완료되고 나면 관계는 급변한다. 이후의 컨설턴트들 간의 관계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사람과 다시 함께 일하고 싶은가?"


YES냐 NO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진다. YES라면 우리는 동료, NO라면 수고하셨습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지 아닌지는 평가이지, 관계와는 다른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있어온 세계는 평가가 곧 관계가 되는 곳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프로젝트 후의 관계가 서로에 대한 평가를 대변했다. 일 잘하고 성격이 원만한 사람들에게는 일도 사람도 줄을 서고, 다시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는 어떻게든 거리를 두는 사회였다. 예외도 없고, 가차도 없다. 360도 다면평가가 체화된 조직. 


그래도 운이 좋게도 나는 지금까지 단단한 팀 안에서 안전한 생활을 해왔다. 좋은 팀장님들 아래에서 다른 걱정이나 불안 없이 일하고 지내는 복을 누렸다. 새 조직에 들어온 이상 이제는 다르다. 나를 이고, 지고, 끌어줄 사람을 이 조직 안에서도 만나야 했다. 


여긴 어떤 모래알들이 모여있을까


나를 알리는 동시에 사람들에 대해 빨리 익혀야 했다. 얼른얼른 눈도장도 찍고, 이름들도 외우고 싶었다. 하지만 큰 장애물이 있었다. 컨설팅이 주업인 회사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회사에 사람들이 없다. 웬만한 컨설턴트들은 다들 고객사에 나가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본사에 나오는 일이 매우 드물다. 우리가 3개월 간의 교육을 마치고 지정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사무실 한켠의 책상에 앉게 되었을 때도 우리 주변에는 결국 우리 자신밖에 없었다. 


이거야 원. 프로젝트로 만날 인연들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가.


그때 눈에 들어왔던 건 사내 동호회 프로그램이었다. 직원 간 친목다짐을 위해서 동호회비를 지원하고 있어 여러 동호회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일과 사생활은 분리해 두어야 삶이 평온하겠지만, 안온한 직장생활을 위해 당분간 그 경계의 허들을 조금 낮추는 노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른 적응하고 싶다는 욕심이 울럭울럭거린다.


두껍아 두껍아 새집 다오

함께 읽기 시작한 책.

내가 택한 동호회는 싱겁기 그지없다. 독서동호회. 사내에 여러 동호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내게 가장 부담감이 없는 활동이 독서였다. 이미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예정인 나의 독서. 한 달에 한 권씩 지정한 책을 읽고 모여 대화를 나누는 동호회였다. 동호회의 지난 독서 리스트를 훑어보았는데 신간과 고전이 알맞게 섞여 있는 조화로운 리스트였다. 이 연령대(이 회사는 연령대가 높다)에 이런 독서 리스트라니, 흥미로웠다. 모임이 온라인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한 달에 한 권이라는 독서량도 오케이였다. 이미 한 달에 네 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으니 그중 한 권 정도야 읽기 싫은 책도 흔쾌히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발 걸쳐둔 독서모임이 이걸로 벌써 세 개째라는 거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목적을 잊지 않기로 한다. 내 목적은 새롭고 낯설지만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 쌓기와 나라는 사람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같은 모래성이더라도 기왕이면 아늑한 두꺼비집을 지으련다. 독서는 핑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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