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역마살이라는 게 있나? 이 집 완전 진국이구만.
꿈이 정착이란 말은? 현실은 나뒹구는 삶 속이라는 것.
지난 7년 간 세 곳의 직장을 다녔다. 세 곳에서 모두 해외 업무를 했다. 지난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내내 해외 출장 중이거나 해외 출장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짐 싸고, 떠나고, 짐 풀고, 다시 짐 싸고, 돌아오고, 빨래하고, 새로 짐 싸고. 캐리어가 이동 용품이 아니라 하나의 가구가 되어버린 생활이었다. 유목민도 나보다는 짐을 덜 싸고 살지 않을까.
이 생활은 너무 버라이어티 한 나머지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고달프게 한다. 일단 업무가 까다롭다. 더 많은 변수를 고려하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했고, 아무리 대비해도 돌발상황은 끝도 없이 일어나므로 나는 늘 긴장 속에서 지내왔다. 그러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했다. 몹시.
그럼에도 7년 간 같은 일을 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로 이 생활이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까탈스런 생활은 불편을 주기도 했지만 분명한 설렘을 자주 느낄 수 있기도 했다. 새로운 풍경, 생경한 문자들, 낯선 소리, 처음 먹어보는 맛, 나라에 따라서 달라지는 몸가짐과 절차들. 그런 것들에 나를 내던져 놓고 적응시키는 데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외부 세계에서 느끼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마르는 날도 오더라.
해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동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궁금한 건 많다. 호기심의 결과 방향이 달라졌다고 해야겠다. 새로운 경험이 주는 놀라움이 이제는 크지 않아서 새 장소에 대한 방문 욕구가 별로 없다.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는 회의주의 필터가 눈에 장착되어 버려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렇게 살고 있군. 끄덕. 이제는 그게 다다. 다만 봐도 봐도 알 수 없는 그들이 속내와 심적 세계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들의 내면이야 말로 이제는 내가 알고 싶은 부분이 되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길거리를 훑어 볼 때보다 그들 역사에 대해 읽거나 그들 문학을 읽을 때 느끼는 게 더 많았고, 그렇게 나는 길을 나서기보다 방구석에서 책 읽기가 더 즐거운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 북클럽 <보이지 않는 세계들>이었다. 관련 글들은 여기에 모여있다.) 내 침대에서도 뭔가를 탐구할 수 있는데 왜 애써 비행기를 타야하나.
그래서 결심했다. 해외 업무에서 탈출하기로. 이제는 어딘가 쿡 박혀 일하고 싶었다.
왜 데이터였냐고 묻는다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의 작용이었다고 답하고 싶다. 해외팀에서 IT 프로젝트 관리를 계속해오던 중 가장 관심 있는 분야이기도 했지만, 내가 커리어 패스에서 이렇게 급격하게 핸들을 꺾기까지는 외부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다. 첫직장 사장님이 작게 던진 말에서 시작되었던 사내 스터디가 꽤 재미있었고, 생각보다 빨리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고, 우연한 기회로 계획에 없던 이직을 했다.
아직까지도 실감 나지 않는다. 해외 프로젝트 관리자로 일하던 내가 이제는 데이터 전문가 집단에서 일하게 되다니.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해외'였던 커리어를 '데이터'로 선회하기까지는 약간의 인내와 노력도 들어갔지만 동시에 많은 우연과 행운이 작용했다. 분명히.
그런데 말입니다, 제 꿈은 '데이터'였다기 보다는 '정착'이었거든요.
세상은 쉽지 않다. 이직 후 새직장에서 3개월. 긴 교육 프로그램 끝에 한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다. 드디어, 프로젝트 사이트로 나가는 건가.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은 전 직장들도 같았어서 조직 문화는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내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차이라면 분야와 고객의 변화였다.
_분야
전자정부 정책 컨설팅 ➡️ 데이터 컨설팅
_고객
해외 정부기관 ➡️ 국내 대기업
좀 더 엔지니어링에 가까운 분야로 옮겨왔고, 고객은 국내 기업들이 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대한 나의 우려가 있다면 전문성을 얼마나 빨리 따라잡을 수 있을까였고, 기대가 있다면 드디어 제대로 된 서울 직장생활을 하는구나였다.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 아주 평범한 그런 직장 생활. 나 이제 출장 없이 사무실 출퇴근하며 그렇게 9 to 6 직장 생활할 수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심장이 뛰는구나.
하지만 세상은 쉽지 않다. 첫 프로젝트로 배정된 곳은 양재(서울 최동남단)였고. 우리 집은 경기 서북부이고. 사이트 출근 첫날 편도만 2시간이 걸렸고. 이용한 대중교통만 버스(20분), 지하철(60분), 따릉이(15분). 3종이고.
첫날 아침, 팀장님께 말했다. 팀장님... 저는 아무래도 숙소를 구해야겠습니다....
집과 빠른 손절. 엄마, 나 집 나가...
정착의 꿈은 다음 프로젝트에서 이루도록 하자.
양재로 반출장 생활 중인 역마 라이프 to be continued...
1. 낯선 세계로 흠뻑 떠나기. 문학적 여행에 대한 이야기: 북클럽 <보이지 않는 세계들>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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