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이 사는 데 전문입니다.
양재에서의 첫 주는 44km 거리의 집에서 통근하면서, 그 고됨을 한껏 느꼈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육체적 피로도가 올라가면서 얼른 방을 구해서 이 고된 생활을 빨리 청산해야겠다는 생각에 처음 보러 간 고시텔에 바로 입주하기로 했다. 회사 경영지원팀에 월세 지원 관련한 절차를 알아보고 이삿날을 정했다.
나의 당찬 계획은, 대충 최소한의 짐만 꾸려 이사하자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평일에만 숙소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집에 와서 쉴 생각이었기 때문에 숙소는 간소한 짐만 두면 될 것 같았다. 다년간의 출장 생활로 최소한의 생필품은 무엇인가를 가려 짐 싸는 데엔 선수였다. 주말에 짐을 싸고 월요일 오전 5시에 택시 한 대 불러 이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회사에서는 주말에 택시 타도 되니까 월요일 아침에 이사하는 무리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주말에 이사하면 혼자 밥 챙겨 먹어야 하는데 참 귀찮거든요.. 오전에 해도 체력에 문제없다고 박박 우겼다.
그리하여 주말에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제는 진짜 미니멀리즘에 성공해 볼 때라며, 당차게 기내용 캐리어를 꺼내왔다. 일주일 살 수 있게만 짐을 꾸려가고, 부족하면 주말에 캐리어 끌고 집에 와서 더 가져가지 뭐.
우선 타지 생활 속 유일한 나의 빛... 희망... 커피 용품을 꺼내 챙기기 시작했다. 다년간 해외 출장 생활에서 아침에 커피를 내려마시며 심신을 달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일종의 리추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엄마, 미안하지만 전동 그라인더는 내가 가져갈게. 핸드밀 꺼내놓을게. 아빠한테 원두 갈아달라고 해.. 전동 그라인더를 뽁뽁이로 정성스레 포장한다. 그러다 아차 싶다. 나 비행기 타는 거 아니지. 뽁뽁이를 굳이 두를 필요는 없겠어. 뽁뽁이를 다시 걷어내고 드리퍼와 물주전자를 챙겼다. 커피필터랑 원두도 조금 가져가는 게 좋겠지.. 당장 원두 살 곳도 모르는데... 엄마... 집에 있는 원두도 그냥 내가 가져갈게.. 어차피 나 없으면 커피 내려마시는 사람 하나 없고 다들 믹스 커피 마시잖아.
휴대용 인덕션까지 챙기자(이사 갈 방에는 화구가 없다.) 20인치 캐리어가 거의 다 차버리고 만다. 옷은 어디 넣고 신발은 또 어디 넣지. 샤워용품도 챙기고 화장품도 챙기고 책도 몇 권 챙겨야 하는데...
슬며시 다시 창고로 간다. 26인치 캐리어를 끌고 와 싸던 짐을 다시 옮겨 넣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이 정도 공간은 돼야 사람 살만한 짐이 담기지.
짐은 대충 다 쌌는데 생각지 못했던 짐이 있었다. 해외 출장 시에는 들고 다닐 일 없던 물품을 엄마가 지목했다.
이불이랑 베개는 안 가져가니?
응.. 엄마, 당연히 가져가야지.
조용히 다시 창고로 간다. 종이 박스 하나를 챙겨 와 이불을 담고, 베개를 담는다. 공간이 좀 남는다... 어쩔 수 없이 옷가지 몇 개를 더 챙기고, 신발을 좀 더 챙기고... 까먹을 뻔했던 모니터도 넣는다. 아직도 공간이 좀 있네.. 독서대를 챙기고... 운동복을 더 챙겨 넣는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박스 하나로 이사할 수 있는 인간종은 아니었다. 이상이 현실과 멀어도 너무 멀었지.
월요일 오전 5시, 일어나서 씻고 옷을 대충 챙겨 입었다. 이 시간에 고양에서 서울 갈 택시가 있을까. 목적지를 양재로 해서 택시를 불렀는데, 바로 잡힌다. 3분 내로 도착한단다. 이런. 짐 먼저 내다 놓고 부를걸.
허겁지겁 박스를 내다 놓고, 캐리어를 내리러 다시 올라온 새에 택시기사님께 전화가 왔다. 아이고, 사장님. 죄송합니다. 짐 하나가 더 있어서 내리고 있어요. 지금 바로 갑니다..
허둥대고 있으니 엄마가 나와 짐 내리는 걸 도와줬다.
너네 회사는 사람을 이 시간에 일어나서 이사하게 시키니?
여유롭게 주말에 가면 좀 좋아
응.. 엄마.. 그게 아니고... (내가 박박 우긴 것임..) 아니야.. 잘 있어.. 금요일에 보자.
택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와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잠깐 잘까? 잠은 오지 않는다. 6시쯤 되니 택시는 자유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혼자 출장길에 오른 것만 같네. 공항에서 호텔 갈 때의 그 설렘과 피곤 섞인 감정이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출장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생활이기도 했다.
그런데 벌써 길이 좀 막히네... 서울은 서울이다.
생각보다 길이 막힌 탓에 2시간이 걸려 양재 숙소에 도착했다. 시각은 오전 8시.
마치 출장 나온 기분이었다가, 방을 보자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벌거 벗겨져 있는 매트리스, 한국형 원룸의 전형적 모양새. 청소 상태도 기대보다 좋지 못했다. (스증늼 분믕 즈믈에 청스흐즈슨드믄스으..)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늑하고 정돈된 방, 새하얀 시트의 침대가 반겨주던 해외 출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출근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방을 좀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청소도구 하나 챙겨 오지 않았구나... 어떻게 물티슈 한 장이 없다...
호텔 생활에 취해 살던 출장러의 고시텔 적응기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