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던 양재에 대해서
양재에 처음 오게 되었을 때는 날 좋은 사월이었고, 사무실은 양재천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진 양재천을 앞에 두고 걷지 않을 이유는 없지. 점심시간이 1시간 반으로 넉넉하기까지 했다. 걷기 좋은 날씨, 걷기 좋은 산책로, 걷기 좋은 넉넉한 시간까지. 걷고 또 걸을 수 있었다. 직장 동료와, 친구와, 또 혼자서도. 매일을 걸었다. 그래서 그런가, 양재에서의 기억 중 많은 부분이 걷기와 엮여 있다.
양재는 이직 후 첫 프로젝트였다. 이직이라는 이벤트에 대해 막연히 상상할 때 점심시간부터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이겠지. 첫 출근의 첫 점심시간이라니. 너무 어색할 것 같잖아. 소름 돋도록, 숨 막히도록 어색할 것 같잖아.
여기는 점심시간이 언제부터일까? 11시 반? 12시? 11시가 채 되기 전부터 내 가슴은 이미 콩닥거린다. 주변에 앉아있는 타 업체 직원들의 동태를 놓치지 않고 감지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 세운다. 열한 시께 부터는 긴장감 때문인가 어쩐지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참는다. 잠깐 사이에 나만 두고 휭-하고 나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사실 상냥한 팀원들이라 그럴 리는 없다.
현실성 없는 걱정은 뒤로 하고 새로운 걱정에 착수하기로 한다. 열 명이나 되는 팀원들이 어떻게 나뉘어 밥을 먹으러 가게 될까. 이런 조합 저런 조합으로 팀원들을 버무려본다. 어떻게 되어도 내가 있는 곳이라면 필시 어색하겠군. 걱정이야. 어디에도 못 끼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을 거야. 그런데 혹시 나한테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헉. 덜컥 겁이 난다. 그것만큼은 대비해 놓아야겠군. 여태까지의 상상 중 가장 고민해 볼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다리를 달달 떨며 몰래몰래 구글맵을 뒤적인다. 사실 내게 묻지 않아도 누군가 먼저 나서서 메뉴를 말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구글맵을 샅샅이 뒤적인다. 확대했다 축소했다, ‘식당’, ‘음식점’ 따위를 검색해보기도 한다. 혹시 모르니 ‘카페’도 검색해 본다.
사실 음식점을 찾으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기보다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밥을 먹게 될 생각에 긴장이 되어서 지도라도 이리저리 옮겨보며 초조함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는 건 어쩐지 두려운 일이다. 불편함을 넘어서는 서스펜스가 있다.
다행히도 11시 반이 되자 “밥 먹고 합시다”라고 크게 외쳐주는 분이 계셨다. 우리 팀은 자연스레 둘로 갈렸다. 시니어 넷과 주니어 여섯. 나는 주니어 쪽에 휩쓸려 빌딩 밖으로 나왔다.
“뭐 먹으러 갈까요?”
첫날 여섯이 둥글게 모여 서서 쭈뼛쭈뼛 물었던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하루를 빼놓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며 어색함을 참지 못한 한 사람이 특정한 메뉴나 식당 이름을 외칠 때를 기다린다. 기특하게도 점심 메뉴는 매일매일 달랐다. 양재엔 식당이 어쩜 이렇게도 많은지. 우리는 가보지 않은 식당을 가기 위해서라면 오래도록 걷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르르 한 식당으로 몰려들어갔다 다시 우르르르 부른 배를 두들기며 양재천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걸었다.
처음 양재 근무를 시작했을 때엔 벚꽃이 한창인 때였다. 곧 질 벚꽃을 놓칠세라,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다 같이 양재천 산책로를 돌았다. 감사한 일이었다. 좋은 날을 만끽해야 한다는 핑계가 있어서 쭈뼛대지 않고도 동료들 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둘셋씩 나란히 걸으며 무게 없는 말들 흘려보내며 깔깔댔다. 벚꽃을 보러 사람이 몰리는 장소가 있다길래 다 같이 몰려가기도 했다. 점심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직장인들과 연인들, 그리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길에 잠시 들러가는 단체 관광객들. 그 사이를 걸으면서 낯섦을 느꼈다. 동료들과 점심시간 벚꽃길 산책이라니. 참 평화롭네.
“엇”
그때 동료 하나가 소리치며 산책로 한쪽을 가리켰다. 시니어분들이 벚꽃나무 아래 인파 속을 걸어 나오고 계셨다. 오. 이런. 서로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눴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호호. 따위의 생각 없이 나오는 말들을 던지며. 멋쩍은 듯 얼른 손만 흔들어주시고는 발길을 재촉하시는 분도 계셨고, 어느 쪽으로 가면 경치가 좋은 지 귀띔해 주시는 분도 계셨다. 아저씨들도 벚꽃을 보러 다니시는군. 나이와 직급 차이로 인해서 느끼고 있던 거리감이 조금은 허물리는 순간이었다. 나와는 멀고 먼 사람들, 삭막하고 어려운 사람들로만 느꼈는데. 봄날 벚꽃길 산책의 낭만을 즐기는 아저씨들이었다니.
그날 이후로 나는 프로젝트 팀에 제안 하나를 했다. 시니어와 주니어로 나누어 식사하는 게 편리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시니어분들과 함께 식사하는 날도 있으면 좋겠다고. 이 이야기를 꺼내놓자마자 몇몇 분이 반색해 주셨다. 때마침 열 명의 팀원을 업무 영역별로 두 개의 미니팀으로 나누어 업무를 하기 시작해서, 주에 한 번씩은 미니팀별로 식사하는 날을 가지게 되었다. 소통할 시간이라면 정규 업무 회의 때도 있겠지만 좀 더 캐주얼하게 이야기를 나눌 자리도 필요했다며 다들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매주 금요일은 미니팀별 점심을 먹는 날이 되었다. 금요일 점심에 달랐던 점이라면, 식사 메뉴 고르기에 더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넉넉히 남아있는 점심시간에는 역시나 다 함께 양재천을 걸었다. 걸으며 별별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 회사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어느날엔가는 복귀 시간이 한참 지난 것도 모르고 수다에 취해 걷다가 뒤늦게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서는 허둥허둥 사무실로 복귀하기도 했다. 벚꽃이 지고 점차 푸르러지는 양재천만큼 어색함을 떨치고 이제는 실없이 웃고 떠들며 편안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우리들을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산책은 핑계고 사실은 서로에게 다가갈 길을 걷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