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생활1_부지런한 동네에서 부지런함 배우기
올해 남은 기간은 여의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회의 때문에 여의도를 와 본 적은 몇 번 있어도 여의도 근무는 처음이다. 여의도는 나에게 이상적 직장 생활을 담보하는 곳이라는 환상이 있다. 높고 번뜩이는 빌딩들과 여의도 공원, 미끈한 정장 차림에 깔끔한 슈트케이스를 쥐고 뚜벅뚜벅 바삐 걷는 직장인의 모습이 그런 인상을 준다. 언뜻언뜻 지나치며 내가 보아온 여의도 사람들의 모습은 그랬다. 번듯한 빌딩에서 번듯한 차림새로 일하는 번듯한 사람들. 이제 나도 그 분주한 직장인들 사이에 섞여 지내보는구나, 언제나 부지런함을 동경해 내게 모종의 기대감이 샘솟았다.
나는 근무지가 바뀌면 출근 루트 정리부터 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환승해서 도착할 것인가. 출근길 설정에 있어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편안함이다. 되도록 환승이 적어야 하고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선호한다. 지하철이 흔들림도 더 적고 정시성 측면에서 마음이 더 편안하니까.
하지만 여의도는 버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며칠간 이런저런 교통편과 시간대를 시도해 보았는데 광역버스를 타고 당산을 거쳐 다니는 게 가장 나은 것 같다. 그게 가장 짧고 안락한 루트였다.
웃기지만 내 출근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환승지는 스타벅스다. 왜 스타벅스냐면... 스타벅스는 가장 많고, 가장 일찍 여는 카페니까. 아침 일찍 나와서 스타벅스에 들러 한두 시간 정도 사부작 사부작 하고 싶은 일들을 하다 출근하곤 한다. 이렇게 브런치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부족한 업무지식을 채우거나 그런 작은 일들을 한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출근할 수 있다.
그러니 교통편을 정해 놓은 뒤로는 근무지 근처의 스타벅스를 찾아다녔다. 여의도, 자그만 섬으로 알았는데 근처에 스타벅스가 여섯 곳이나 있다. 심지어 두 곳은 리저브 매장이었다. 버스 하차 지점에서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다녀보기로 했다.
스타벅스 매장은 생각보다 다양한 구색으로 운영되고 있다. 큼직하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보면 대화하기 편안한 매장, 작업하기 좋은 매장, 테이크아웃 위주의 매장이 있다. 아마 카공족이라면 좀 더 잘 체감하지 않을까 싶다. 자주 가게 되는 작업 친화적 매장이 따로 있기 마련이니까. 나도 카공족에 가까운 이용객이라서 매일 가게 되는 매장, 매일 앉게 되는 자리가 따로 있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매장은 금방 추려낼 수 있었다. 평소 찾기 어려운 리저브 매장부터 가봤다. 인근의 리저브 매장은 이른 시간부터 대화하러 오는 팀이 많았고 생각보다 대화가 잘 들려서 내가 머물기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가본 매장은 테이블들이 2층에만 있어서 음료 픽업이 부산스럽고 귀찮았다. 바 앞에서 음료를 기다리며 서있자니 내 아침시간은 1분 1초가 아깝달까. 인근의 스타벅스들을 돌아보며 여의도의 지리를 찬찬히 익혔다
결국 나는 두 곳의 매장을 번갈아가며 다니게 되었다. 주로 가는 매장은 정류장 앞 스타벅스인데, 두 번째 오던 날부터 이곳이 내가 머물게 될 곳임을 직감했다. 겨우 두 번째 방문인데 단골 이용객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앗 어제도 봤던 사람!). 텀블러에 음료를 받아온 커피에 단출한 도시락을 까먹고 출근하는 아저씨, 중앙 테이블에 앉아서 딱 40분 앉아있다 떠나는 사람. 단 한 번 본 얼굴인데도 반갑게 느껴진다. 혼자 조용히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 여기는 내 마음이 평온할 수 있는 곳이야. 정류장 앞 스타벅스는 매일 거쳐가는 곳이 되었다.
가끔 가는 다른 매장은 어느 쌀쌀한 날, 시간 조절에 실패(?)한 덕에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린 날이었다. 스타벅스가 열기 전까지 아침 찬 공기 속에서 오들오들 여의도 공원을 산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먼데 떨어진 매장까지 걸으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안 가본 매장을 가보려고 매장 정보를 보는데 이미 사이렌 오더가 가능한 스타벅스들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때 시각 6시 45분. 그랬다. 여의도에는 6시 30분에 여는 매장이 있었다. 그것도 네 곳이나(여의도, 여의도 IFC(1F), 여의도공원R, 여의도신한투자증권타워, 여의도일신).
여섯 시 반에 여는 그 매장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내가 환상 속 직장인처럼 생각하는 흰 셔츠에 윤기 흐르는 재킷을 걸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 '수고했어'라는 말을 연신 주고받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의도에 대한 환상 일부는 맞았다. 이 동네는 일찍 일어난다. 그렇지만 일찍 일어나는 새라고 빠르게 날지는 않았다. 내가 기대했던 바쁨이나 치열함은 체감되지 않는다. 오늘도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서 사람들이 다급함 없이 사뿐사뿐 여유를 밟으며 출근하는 모습을 본다. 마음 한켠이 따뜻하다. 아마도 이건 질투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