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 에이치 Dec 05. 2021

가끔 미식_이탈리안 Green Pepper

시뇨레.... 저 배 터져요...

주말이 당도했다. 출장지에서의 내 주말은 보통 늦잠과 커피, 아침 운동, 샤워, 이른 점심, 다시 커피, 늦잠, 독서 같은 잘고 느긋한 활동들로 아주 느슨하게 이어진다. 이번 출장에서는 숙소를 BKK 시내 중심으로 옮기면서, 낮 시간에는 혼자 걸으며 시내를 둘러볼 용기가 생겼다. 이대로 화이팅해서 주말 점심식사는 되도록 먹고 싶은 음식이나, 훌륭한 식당을 다녀보기로 한다. 표어는, 주말 미식!


작은 사치, 미식 트립


물가 상대적으로 낮은 나라로 여행을 가는 재미 중 하나는, 작은 사치가 아닐까. 고급 식당도 서울에서의 외식 물가와 비교하면 감당이 가능한 수준이 된다. 마음 맞는 출장자가 있으면 정말 즐거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데, 그런 출장자를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출장팀은 대부분 연령이 나보다 훨씬 높아서 더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내가 가장 반기는 인원은 아무래도 통역사님들이다. 통역사님들은 여성도 많고, 연령대도 나와 비슷할 때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 해외의 문화 전반에 대해서 관심이 넓어서 내가 제안하는 모든 활동을 반색하며 함께 해주실 때가 많다. 미술관을 간다던지 로컬 식당을 찾아가거나, 프렌치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풀코스 식사를 박살내고 온다던지.


그러나 이번 출장에서 나는 혼자다. 진실로 혼자라기보다는 내 관심사를 진정으로 공유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혼자서라도 다니기로 했다.


미식 토요일의 서막


오늘은 알람 없이 눈이 떠지는 시간까지 잠을 자고 일어났다. 8시. 조금 더 느적여 본다. 


아침식사는 간단히 커피와 오버나이트 오트밀, 과일을 먹었다. 과일은 출장 인연이 사준 포멜로와 잭 프루트, 그린 망고. (➡관련 이야기) 오버나이트 오트밀은 주말 아점으로 내가 선호하는 음식이다. 자기 전에 요거트에 오트밀을 부어놓고 아침에 꺼내 먹으면 그렇게 맛나다. 오트밀은 따듯한 우유에 데워서 시나몬을 살짝 뿌려 먹어도 맛있지만, 이렇게 요거트에 재워두었다가 과일에 곁들여 먹을 때 가장 맛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오트밀을 두고 종이박스를 씹는 것 같은 맛이라고 하던데, 그 말도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우리 오트밀, 맛있다구요. 커피와 가장 합이 좋았던 과일은 잭 프루트. 아무래도 블랙커피는 새콤한 과일보다는 달큼한 과일과 잘 어울린다.


커피 로드, 로스터리 카페를 찾아서


소파에서 <위대한 수업>을 챙겨보다가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일어나 씻고 나왔다. 커피가 다 떨어져 가기 때문에 커피를 사러 가야 했다. 라떼도 한 잔 하기로 한다. 로스팅을 매장에서 직접 하는 커피숍을 찾기가 어려웠다. 오늘 가볼 곳은 Tarrazu.  매장 입구에 커다란 로스터기가 있는 카페였다. 따라주는 4-5종의 싱글 오리진 커피를 로스팅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커피가 먹고 싶던 나는 별 망설임 없이 예가체프를 골라 담았다. 이 카페는 주인장이 한국인이라고 하던데, 오늘은 캄보디아 직원이 귀엽게 커피를 내어주었다. 앉아서 책을 조금 읽다 보니 두 시가 다 되어간다. 배도 슬쩍 고파 온다.


오늘 외출의 본격적인 목적, Green Pepper로 나섰다.


시뇨레, 저 혼자 왔어요.

고전적 테이블 세팅. 흰 식탁보와 붉은 장미.

혼자 밥을 먹으려 할 때 가장 어색한 순간은 아무래도 식당에 들어서는 첫 순간일 것이다. '몇 명이신가요?'라는 물음에 '혼자 왔습니다.'라는 답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는다. 물론 다년간의 혼밥 경험을 쌓은 지금은 '한 명이에요.'라는 말이 쉽게도 굴러 나온다. 아마, 혼자 방문하는 손님을 그리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늘 환대로 돌아오는 경험을 여러번 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식당은 생각보다 혼자 오는 손님을 미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의식적으로 바쁜 시간대를 피해 다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언제나 환영받았고 느긋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린 페퍼 주인장 아저씨의 환대는 내가 받아본 환대 중 가장 경쾌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주인장 아저씨는 신나는 목소리와 정중한 제스처로 어디든지 원하는 자리에 앉으라고 말해주셨다.


그린 페퍼는, 음식 사진을 넘겨보다가 흥미로운 파스타가 눈에 띄어 무작정 방문한 레스토랑이었다. 그런데 아저씨의 환대뿐 아니라 테이블의 첫인상도 참 좋았다. 하얀 테이블보에, 테이블마다 생화가 꽂혀 있었다. 그것도 붉은 장미가. 요즘 같은 시대에 빨간 장미에 안개꽃이라니, 미소가 지어졌다. 클래식한 꽃 취향을 보니 음식이 더 기대되었다.


나는 초록이 가장 많이 보이는 테이블에 주방을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메뉴를 받아보니 내 생각보다 방대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가격대도 꽤 있었다. 애피타이저가 $12~$20 정도의 가격대였고, 파스타는 $18~$30 정도의 가격대였다. 그리고 VAT 10%와 Service charge 7%도 별도였다. 그렇지만 궁금하고 먹어보고 싶은 메뉴가 정말 정말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파스타만 두 그릇 주문하고 싶었지만 애피타이저를 포기하기는 또 아쉬웠다. 


고심 끝에 부라타 치즈를 얹은 부르스게따와 앤초비 오레키에테 파스타, 와인 한 잔을 시켰다. 가능하다면 티라미수까지 먹고 가리라. 이곳 커피맛은 또 어떠려나. 분명 훌륭할 것이다. 이렇게 테이블마다 장미를 꽂아두는 섬세한 주인장 시뇨레와 섬세하게 이달의 스페셜 메뉴를 뽑아두는 셰프 시뇨레는 맛없는 에스프레소를 참지 못할 것 같다.


Bruschetta with Burrata cheese / $15.50

와인에 식전 빵과 버터를 먹고 있다 보니 금세 부르스게따가 나왔다. 와우. 정말 깜짝 놀랐다. 가격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양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부르스게따만으로 한 끼 식사로 충분해 보였다. 여기는 4인 테이블 기준으로 양을 잡았는가 보다. 그렇지만 저는 혼자 왔어요.. 시뇨레.. 


치즈가 살짝 녹을 정도로만 데워진 빵이 기분 좋게 따듯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싱싱한 바질을 보는지. 한 입 베어 물고 두 번, 세 번 씹었을 때 입에 확 번지는 바질 향이 나를 정말 행복에 겹게 했다. 정말 맛있었다. 토마토가 한국 장마철 토마토처럼 약간 싱거웠던 것이 살짝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너무 맛있게 먹은 부르스게따였다. 게다가 부르스게따를 몇 조각 먹고 나니 아래에 깔린 루꼴라가 보였다. 루꼴라를 깔아 두셨다니. 루꼴라 너무 좋지... 샐러드에 쓰이는 채소 중에 루꼴라가 가장 맛있는 것 같다. 루꼴라의 그 적당히 달게 쌉쌀한 맛이 너무 좋다.


루꼴라 한 더미 / on the house

부르스게따를 세 개쯤 먹었을까. 접시 하나가 새로 왔다. 파스타가 나온 게로구나. 그런데 초록이 수북하다. 대단히 신기한 비주얼이네.


"We think you love rucola. Please enjoy."


내가 루꼴라를 싹싹 긁어 모아 먹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던 걸까. 루꼴라 한 사발을 선물 주신 것이었다. 샐러드볼에 싱싱한 루꼴라가 한가득이었다. 실로 웬만한 샐러드 한 그릇보다 풍성했다. 살짝 쑥스러워졌다. 내가 엄청난 리액션을 하면서 루꼴라를 먹었던가. 영혼의 단짝 같은 풀이라는 걸 어떻게 아시고는.. 대단한 식당이야.


Friarielli Orecchiette / $19.50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을 것 같던 부르스게따는, 먹다 보니 뱃속으로 차곡차곡 잘 들어갔다. 맛있으면 0 칼로리라는 말은 거짓이더라도, 부피는 0인 게 확실하다. 부르스게따를 다 먹자마자 귀신 같이 프리알리엘리 오레키에테가 나왔다. 아저씨는 천천히 시간을 가지며 먹으라며 미소를 담뿍 보여주시고는 자리를 피해 주셨다.


사실 프리알리에리가 뭔지는 잘 몰랐고, '오레키에테'와 '앤초비'가 눈에 띄어 주문한 파스타였다. 파스타의 묘미는 다양한 면을 먹는 재미니까. 앤초비의 짭조름하고 쿰쿰한 맛을 좋아하니 이런 메뉴는 넘어갈 수 없다. 그런데 기대도 않았던 프리알리에리가 정말 맛있었다. 시래기로 백김치를 담가서 볶은 맛이었는데 난 이런 맛 너무 좋아해... 새로운 맛. 짜릿해. 위에 뿌려진 파마산 치즈까지 너무 완벽했다. 오랜만에 맛있는 치즈 듬뿍 먹었다. 더 먹기 힘겨워지자 전략을 바꿨다. 프리알리에리만 쏙쏙 골라 먹고는 식사를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릇에 더 이상의 초록이 없어졌을 때, 손을 들고 계산을 청했다. 아, 정말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 좋은 서비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그런데 친절하게 내게 내민 것은 계산서가 아니었다.


Tiramisu / on the house

티라미수였다. 저기요.. 시뇨레? 저 지금 배가 많이 부른데요. 처음 이 식당 메뉴를 뒤적거릴 때 가졌던 티라미수에 대한 원대한 나의 계획은 말이지, 프라이리엘리 이후로 완전히 깜깜하게 잊혔었다. 조금 난처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배가 많이 불렀다. 손이 가지를 않네. 주신 성의를 생각해서 맛있게 먹고 나가고 싶은데, 반이나 먹을 수 있을까.


한 입을 먹고 나니 한 조각을 다 해치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숟가락이 절로 움직이더라니까요? 맛있는 음식은 부피가 0인 게 확실하다.


식사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기진맥진한 것은 왜 일까. 눈이 감기는 것 같고, 낮잠이 고파진다. 이제야 말로 일어나서 집에 가야 할 때다. 

Homemade Limoncello / on the house

그렇지만 나만 모르는 계획이 하나가 더 있었으니. 웨이트리스는 해피한 얼굴로 리몬첼로를 가져다주었다. 아주 스트롱하니 천천히 마시라는 충고와 함께.


리몬첼로는 반 병을 마시고는 더 마시지 못 했다. 배가 꽉 차기도 했고, 돌아가서 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지나친 음주가 조금 우려되기도 했다. 시뇨레.. 실망은 말아주세요. 다음엔 더 준비된 배로 오기로 한다. 특히 주말 저녁에는 라이브 공연도 한다고 하니 다음번엔 꼭 저녁을 먹으러 와서 생선 요리를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대단하고 끝내주는 한 끼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각 오후 10시. 점심 식사를 한지 벌써 7시간이 넘게 지났고, 그간 나는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샤워도 하고, 다이어리도 적었는데 배는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 요리를 그만둔 뒤로(➡관련 이야기)  참으로 오랜만의 과식이다. 그렇지만 내일도 주말인 이상 미식을 해야 한다. 미식, 화이팅!




관련 글

⬇ 낯선 이가 선물해 준 과일 세 팩 이야기

⬇ 요리를 그만두게 된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길거리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