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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Dec 04. 2021

길거리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바라보기, 이름 묻기, 도움 주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출장의 즐거움인가 괴로움인가. 출장은 다른 시공간에서 삶을 살게 한다. 그리고 출장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강제한다. 공간을 옮기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공간을 옮기는 이유가 새로운 사람들과 대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논의의 상대방이 저 멀리에 있을 때, 그리고 거리가 기술이나 의지만으로는 극복되지 않을 때, 또는 반대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의지와 열의를 보여주고 싶을 때 출장이라는 이벤트가 생긴다. 그렇다고 출장 중에 이러한 진중한 업무적 만남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출장의 분주함은 많은 장소들을 훑고 지나가게 하므로 많은 사람들과 옷깃이 스친다. 어쩌면 내 옷깃은 너덜너덜 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스침과 헤어짐. 


그럼에도 가끔 붙들어 보듬고 싶은 옷깃을 마주칠 때가 있다.


캄보디아에 도착한 지 2주 차.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 호주와 발리를 한 데 섞어 놓은 듯한 식당이었다. 물론 나는 호주도 인도네시아도 가본 적은 없다. 우리는 2층 목조물 테이블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수줍게 다가와 과일 꾸러미를 내밀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파는 물건을 한 번도 사본적이 없다. 나의 구매는 아이들이 노동 시장에서 탈출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노동 시장의 피와 살이 되고, 아이들은 더 커진 노동 시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돈벌이에 착취당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따로 있다는 보도를 읽고 분노하기도 했다. 차라리 아이들이 따로 챙겨갈 수 있도록 돈을 조금 쥐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이 구걸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이들이 다가와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늘 어쩔 줄 몰라하며 그저 '미안해'라는 한 마디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내가 해왔던 최선이었다.


그런데 어제 만난 이 사람은,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Hey! Come here! What is your name?"


쭈뼛거리며 이름과 성까지 말해주는 아이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어주고는 아이가 팔고 있던 과일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열심히 고르기 시작했다.


"이런 과일 아직 다 못 드셔 보셨죠?"


그는 아이가 팔고 있던 과일 열두 팩을 샀다. 그러고는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에게 과일을 넘겨주며 아이의 표정이 환해지는 걸 보며, 그의 낯도 따라 밝아지는 걸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많이 슬퍼지기도 했다. 내가 외면하고 돌려보냈던 아이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길에서 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나는 왜 한 번도 그처럼 하지 않았을까? 이 아이는 오늘 저녁 잠시간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기보다 훨씬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의 최선이 과연 선의였을까. 어쨌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왔다. 그저 인색함에 구차한 변명을 곁들였을 뿐이지. 아이 얼굴에 순식간에 퍼지던 미소가 계속 떠오른다.


세 팩. 2.5달러.

나는 세 팩을 받았다. 포멜로, 그린 망고, 잭푸르트.


그의 기대와 달리 이 중 내가 먹어보지 못한 과일은 없다. 그렇지만 그가 사준 것은 그저 이국적인 과일이 아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사보지 못한 것을 사주었다.


온갖 사람을 다 만나게 되는 것, 이것이 출장의 즐거움인가 괴로움인가. 나는 괴로움이 더 크다고 본다. 그렇지만 가끔 이런 만남으로 내가 조금 더 사려 깊고 따뜻한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을 준비하게 한다면, 괴로움 다 견딜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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