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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 에이치 Dec 02. 2021

3km 달리기가 왜 이렇게 영원 같은 건데

7-to-16 저녁이 있는 출장 생활, 러너가 될 수 있을까

아홉수 그것 참 사납다


내가 러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건 몸이 아프면서부터였다. 아홉수라고들 하던가, 만 스물아홉이 되자마자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육체 한계는 하향세인데 나의 욕심은 천진하게도 무럭무럭 자라난 탓 같다. 체력의 현실과 다짐의 이상이 극렬히 충돌한 결과 몸에 탈이 난 것이다.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었다는 확인

나는 크로스피터였다. 라고 당당히 말하자니 떳떳하지는 못하다. 실력이나 인내심, 또는 꾸준함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었고 열정보다는 의무감으로 한두 번 운동을 나가는 게 다였으니까. 그래도 피곤함을 이기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퇴근길에 박스에 들러서 운동을 하려 노력했다. 크로스핏은 내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크고 깊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바쁘고 힘든 직장생활 중에도 꼭 지키고 싶은 노력 중 하나였다. 몸은 시간을 들이면 그만큼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멀어보이던 보이던 목표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를 지속하면 몸은 언젠가 화답해주었다. 


아프니까.. 러닝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몸이 여기저기 돌아가며 심각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킬레스건염이 도져서 아침에 울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뒤꿈치를 땅에 디딜 때마다 뒷 발목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팔 힘이라도 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발 대신 몸의 무게를 지탱할 팔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했다. 반깁스를 하고 정형외과를 들락거리면서 아킬레스건염은 호전되었지만, 몇 개월이 훌쩍 지난 뒤였다. 몇 달을 쉬다가 겨우 박스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풀업을 하는 왼 손목의 느낌이 이상했다. 그 이후로 손목은 급속도로 안 좋아지더니 급기야 문고리를 돌리거나, 바닥을 짚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졌다. 배 힘만으로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단련해둔 배 힘이 아니었다면 아침마다 처참한 몸동작으로 일어나야만 했을 것이다. 외과적 치료에 1년을 매달렸지만, 손목은 낫지 않았다. 나중에야 단순한 손목 염증이 아니라 지병이 새로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내과적 치료를 시작한 지 이제 9개월. 완전하지는 않지만 문고리는 조심조심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손목은 조금조금 차도를 보였지만 나는 불행했다. 손목에는 늘 단단한 보호대를 차고 있었고, 조그만 하중도 주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하는 생활이었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이, 키보드나 겨우 두드릴 수 있는 9개월이었다. 문서 작업은 할 수 있어 직장생활이라도 연명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할까.


밥벌이만 겨우 하는 생활이 2년 가까이 이어지자 나는 울적했다. 애써 단련했던 체력이 빠르게 무너져감을 느꼈고, 무언가 몸을 단련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구에 지독하게 매몰되었다. 이런저런 운동들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내 손목으로 소화가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았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건 이래서 손목이 아프겠고, 저건 저래서 손목이 악화되겠구먼. 그래도 수영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회사 근처 수영장을 알아보았지만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19의 시대였다. 열린 스포츠 공간이 없었다. 운영을 하더라도 샤워실 이용이 제한되었는데, 그럼 미라클 경기도민인 나는 땀냄새를 풍기며 광역 버스를 타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이기는 부릴 수 없었다.


코로나19의 시대는 온갖 좌절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했다. 유연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8시 출근 17시 퇴근이 가능해졌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그럼, 일찍 퇴근해서 동네 달리기라도 하자.


초록이 붉게 물드는 순간의 달리기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때는 한 여름이었다. 내가 달리던 시간은 해 질 녘, 아직 태양의 힘이 완전히 떠나지 않은 온습한 공기는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제때 달리기를 시작한 것 같아 기뻤다. 서둘러 퇴근해서 뛰쳐나오면 분홍 노을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정말 달리기 제철이군!


얼음 추위, 유리 몸


제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자 나는 바로 병이 났다. 혼자서 하는 러닝이었지만, 유튜브를 선생 삼아 달리던 때였다. 러닝에는 여러 착지법이 있었고 착지법을 이리저리 연습해보고 있었다. 첫 1km 구간은 포어풋을 연습했다. 정강이 피로가 쌓이면 미드풋으로 전환해서 더 달리는 식으로 훈련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날은 몸이 움츠러들게 쌀쌀한 날이었다. 800m 정도 달리자 발등에 찌르는듯한 통증이 왔다. 바로 포어풋을 버리고 500m 정도를 더 달렸는데 그게 큰 실수였던 모양이다. 통증이 줄지를 않아 걷기 시작했는데 걸을 수록 발등이 아파왔다. 절뚝거리며 20분을 걸어 집에 겨우 돌아갔다. 그 뒤로 나는 3일간은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통증은 점점 경미해졌지만 3주가 지나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추위에 취약해서 날이 차지면서 늘 불안했는데, 몸은 역시나 솔직하게 반응해왔다. '추워, 나 안 할래.' 그 뒤로 나는 달리기가 무서워졌다. 날이 더 많이 추워졌으니까.


여름의 품에서 다시 달리기


그리고 올 것이 왔다. 여름! 정확히 말하자면 여름 나라로 내가 날아온 것이지만. 여름의 품 속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였다. 땀 흘리기. 비적비적 스며 나오는 땀이 아니라, 송골송골 후두둑 떨어지는 구슬땀을 흘리고 싶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출장지에 도착해서 첫 주말이 당도하자마자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이틀에 한 번, 최소 3km씩을 달렸다. 가장 길게 뛰었던 건 6km. 그리고 그 뒤로 발등을 다쳐서 1개월을 쉬었다. 그러니 캄보디아에서의 첫 달리기 목표는 낮잡아 2km로 설정했다. 또 다시 탈이 난다면 많이 속상할 것 같다. 욕심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조금씩 회복해서 다시 3km, 4km, 5km까지 달려보기로 한다.


첫날은 순조롭게 2km를 달렸고, 둘째 날은 2.5km, 셋째 날은 3km를 달렸다. 그리고 당분간 3km씩을 달리기로 했다. 그리고 점차 페이스를 올려 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던 중 출장팀끼리 출근 시간을 조정하기로 협의가 되었다. 7시에 출근해서 16시에 퇴근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끔찍할지 모를 계획이지만, 내 시간을 온전히 저녁에 몰아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기뻤다. 퇴근 후 숙소에 오면 넉넉잡아 오후 5시쯤이 될 것이다. 달리기를 하고 나서 저녁밥을 차려 먹기 딱 알맞아 보였다. 그리고 남은 저녁은 글을 쓰거나 책을 읽자. 내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자 온 여름이 나의 달리기를 응원해주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영원의 3km

퇴근 후 달리기. 가자!

오늘은 계속 눈에 밟히던 스미스머신을 사용해 웜업을 하기로 했다. 스미스머신은 하이엔드 파워렉 같은 기구인데, 써본 적이 없어서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헬스장을 가본 적이 없다). 유튜브로 사용하는 모습을 몇 번 보고 나니 손목에 중량 부담 주지 않고 스쿼트나 데드리프트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꽤 간단하군. 한 번 해볼까. 그간 중량 운동을 오래도록 쉰 탓에 부들부들할 때까지 온 힘을 쏟는 그 느낌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무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으니까. 15kg으로 스쿼트 20개*2회, 데드리프트 20개*2회를 하고 나니 힘깨나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 숭덩숭덩 뿜어져 나온다. 이 기분 좋아!


기세를 몰아서 위풍당당하게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사실 마음은 위풍당당했으나, 하체는 이미 노곤노곤 미적거렸다. 마음이 힘을 줬다. '해야 한다. 할 수 있다.' 옆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을 슬쩍 의식하며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악몽 같은 2주를 선사해준 포어풋이었지만, 나는 여름 곁이니까 슬쩍 다시 도전해본다. 속도를 조금씩 높여서 달리는데, 확실히 오늘따라 다리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앞선 스쿼트와 데드리프트 때문인가, 15kg이 이만큼이나 부담되는 무게가 되었다니. 몸, 이 영리한 것. 안 쓰니까 바로 이렇게 쇠퇴하는구나. 


지난번보다 느린 속도인데도 겨우 따라잡으며 달린다. 숨이 차다. 속도를 내리고 싶지만 옆 사람을 의식하게 된다. 나약해 보이겠지. 싫어... 속도를 더 천천히 올릴걸. 조금 더 버텨보려 했지만 너무, 너무, 너무 힘들다! 숨이 차요... 정말 숨이 차... 숨이... 결국 속도를 낮춘다. 눈치 없는 기계가 오늘따라 신경질스럽게 삑-삑 댄다. 얌전히 좀 해라.


400m 정도 달렸나, 여전히 힘들다! 숨이... 차다. 숨이... 차... 1km도 달리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웜업이 내게 너무 본격적인 운동이었나보다. 조금 우울해진다. 몸, 이 영악한 것. 잠깐 좀 놀았다고 이렇게 쇠잔해져서야 백 세 시대를 어떻게 살란 말인지. 나이 들어서도 건강히 살려면 한시도 안심할 수 없이 매일을 긴장 속에 운동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어떻게든 더 달려보려고 하지만 10초가 1분 같이 느껴진다. 시계 초만 바라보며 달리다가 30초도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버튼에 다시 손이 간다. 이번에도 얌전히는 안 되겠지? 역시나 찢어지는 버튼음. 옆에서 여전히 평온히 달리고 있는 그가 너무 부러워진다.


그 뒤로는 느림보의 속도로 달렸다. 3km만 달리고 내려가고 싶은데 너무 느리게 달려서인지 달려도 달려도 거리가 올라가지를 않는다. 아직 1.5km라니 정말 절망적이었다. 그러다 워치를 보니 달린 거리가 머신과 차이가 난다. 1.5배 정도. 꽤 큰 차이였다. 머신은 트랙을 굴리는 속도와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고 있으니 당연히 머신이 워치보다 정확할 것이다. 워치가 요즘 자꾸 멈추더니 아주 돌아버렸군. 그런데 정말 미치도록 숨이 차다. 결국 걷는 속도로 내렸다. 옆자리의 그는 여전히 평온하고 가볍게 달리고 있다. 그대가 여러 해 간 쌓아온 성실함의 결과를 오늘 하루, 이 잠깐의 만남에서 시기 질투해서는 안 되는 거겠죠? 그래도 나만 너무 힘든 게 짜증 난다.


걷다가 달리다가 하면서 3km만 채우자. 목표를 슬쩍 하향 조정한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시간이 영원 같다. 나는 계속 달리는데 3km 종점은 닿을 기미가 없다. 나는 거북이를 잡으려고 하는 아킬레우스가 되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이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아킬레우스보다 거북이를 100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우스가 100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10m를 가고,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10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1m를 나아간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리는 동안 거북이 역시 움직이므로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출처: 위키피디아-제논의 역설)


스미스머신 대단한 요물이네... 그거 잠깐 했다고 달리기가 이렇게 차원이 다르게 힘들어지나? 힘들어서 정말 더는 하고 싶지가 않다. 30분까지만 달리고 내려가자. 목표를 대폭 수정한다. 그리고 마지막 5분은 거의 걷듯이 달려서 억지로 30분 러닝 시간을 채웠다.


30분 간의 아킬레우스 투쟁의 결과

아킬레우스의 거북이 가정은 이제 나에게 경험적 진리가 되었다. 내 경우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3km라는 목표점은 가만히, 얌전히 그곳에 있을 뿐이었는데 절대 닿을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뛰는 동안 거북이는 기어가기라도 했어... 절망의 러닝 기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겨우 2.52km를 달렸다. 3km가 이렇게나 멀고 멀었다. 아주 영원이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나는 2.52km가 아니라 2.52 mile을 달린 것이었다. 그랬구나... 마일이라면 에미넴의 8 mile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미터법으로 설정을 바꾸어 다시 결과를 확인했다. 1mile은 대략 1.6km에 해당했다. 나는 대략 4km를 달린 것이었다. 이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가 간다. 나는 평소의 1.6배의 페이스로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이고, 지난 달리기보다 1km를 더 달렸다. 


미국아 너네 나라는 왜 그러니. NASA에서 도량 실수 때문에 계산이 틀려서 로켓 하나를 터뜨리고도 마일법을 고수하는 저의가 뭘까. 어쩐지 낮은 속도로 달리는데도 숨이 많이 차고, 달린 거리가 올라가지를 않더라고. 무엇보다 꽤 괴롭더라고. 덕분에 뜻밖의 무리를 했다.


워치는 돌아버린 게 아니었고, 3km도 영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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