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소하게 먹고 지내기
나는 자주 새 다짐을 세운다. 정말 지켜내는 다짐은 많지 않지만, 자질구레한 이유들에 부처 마음을 새로 먹어보는 것이다. 이번엔 2개월 간의 해외 생활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새로운 다짐도 필요하다. 작년에 같은 도시에서 3개월을 지냈으니 작년 3개월의 생활 중 아쉬웠던 점을 생각해보았다.
가장 아쉬웠던 건 별로 한 일이 없었다는 것. 나는 내가 폭풍 성장할 줄로 알았는데, 그런 상상은 역시 판타지였다. 내 역량은 그저 비슷한 수준에서 머물렀다. 문서 작업에 있어서도 그러했고, 영어 실력도 그러하다. 작년에는 ABCD까지의 업무 중 A를 겨우 해냈다면, 이번에는 B까지는 해내고 싶다. 영어를 사용할 기회도 매우 한정적이었다.
생활에 있어서는 반성할 것이 더 많다.
첫째, 나는 모험적이지 못했다. 혼자서라도 가보고 싶었던 식당과 카페들은 다 가볼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작년에는 출장 인원들끼리 여기저기 잘 다니기도 했지만, 정말 가보고 싶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나 채식 식당, 멕시칸 식당, 로스터리 카페나 바들은 거의 가지 못했다. 바를 제외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용기 내 가볼 수 있을 만한 곳들인데, 귀찮다는 이유, 혼자서는 멀리 다녀오기 두렵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둘째, 나는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제대로 일기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사실, 기록에 대한 후회는 늘 하게 되는 것 같다. 멕시코에 있을 때 그 생활에 대해서 제대로 남기지 않았던 것, 그때 했던 사랑에 대한 감정과 생각들을 남기지 않은 것, 과테말라에서의 인턴 생활 중에 읽었던 많은 책들에 대해서 남기지 않았던 것, 동생과의 유럽여행이나 엄마와의 태국 여행에 대해서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 지난 5년 간의 직장 생활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은 것 등. 지나간 일들이 어렴풋한 잔향처럼 인상만 두둥실 떠다니게 된 데에는 내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셋째, 나는 나의 한국 생활 루틴을 지켜내지 못했다. 한국에서 출퇴근 생활을 할 때에, 나는 보통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여섯 시 전에 집에서 나온다. 그럼 일곱 시 께에는 회사 근처 카페나 스터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다. 출근 전까지 한두 시간의 조각 시간으로 나는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거나,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한다. 첫 출근을 했던 2016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쭉, 출근 전에 일정 시간을 나를 위해서 비워두고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루틴은 출장만 오면 꼭 무너지고 만다. 작년에는 무려 3개월을 출장지에서 보냈는데, 그 3개월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는다거나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 늘 실패해왔다.
넷째, 나는 요리에 너무 많은 시간과 자원을 썼다. 맛있는 식사는 생활에서 중요하다. 작년 출장 생활 때에는 온갖 양념과 조미료, 식재료를 냉장고에 구비해두고 매일 저녁 식사를 해 먹었다. 냉장고에 된장찌개에 넣어 먹을 오만둥이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하면 그 규모와 정성이 감이 올까? 저녁에 간단하게는 파스타나 볶음밥에서부터 정성 들여 찌개를 끓여 먹거나 수제비를 해 먹는 등 요리를 열심히 해 먹었다. 그렇게 밥 한 끼를 해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두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 나는 이제 그런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한국에 귀국하기 위해 방을 정리하면서 남은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을 버리고, 냉장실을 비우면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건 대단한 자원 낭비야.
정말 대단하고 소박한 결심을 했다. 먹는 재미를 포기하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다. 그렇지만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소박한 결심이다. 요리를 안 하는 것쯤이야 게으름만 잘 피워도 해낼 수 있는 다짐이 아니던가. 주방에서 요리를 몰아내고, 조리만으로 2개월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조리란 굽기, 데치기, 삶기, 볶기 정도를 말할 텐데, 조리의 기준을 엄격하게 정해두지 않으면 내 욕심이 슬금슬금 자라나 어물쩍 요리와의 경계를 허물고 온갖 성대한 조리 파티를 열게 될 테니 확실히 해두려고 한다.
시간 투입 최소화
1. 두 가지 이상 조리법 사용 금지
2. 설거지가 어려운 조리법 금지 (튀기기 등)
자원 투입 최소화
1. 새로운 조리도구 구매하기 금지
2. 다 사용하지 못하고 갈 양념 구매 금지
3. 대용량 구매 금지
채식 위주의 건강한 식단
1. 인스턴트 금지 (라면)
2. 냉동식품 금지 (만두, 반조리 식품)
3. 육식 최소화
아웃소싱의 지혜로운 활용
1. 김치 사 먹기
2. 가보고 싶던 식당 도장 깨기
아니, 그럼 집에서는 삶은 야채 쪼가리나 먹겠다는 이야긴가? 맞다. 해보려고 한다. 요리 없이 살면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질까? 오히려 올라가지 않을까? 나는 그 점이 몹시 궁금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요리를 해서 맛있는 걸 먹는 생활에서 더 만족감을 느낄까, 아니면 대충 먹고 다른 일(주로 누워있기)을 하는 데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낄까? 알아내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극단적 간소화를 도전하다 보면 균형점이 절로 찾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면 거기가 최종 목적지가 되는 거니까.
도착 당일 숙소 체크인에 앞서서 작은 24시 마트에 잠시 들렀다. 작년과 같은 마음이었다면, 아마 라면, 계란, 감자칩, 맥주 등 이것저것을 더 샀을 것 같다. 올해는 건강하게 먹기로 한다. 라면 정말 너무 맛있지만, 라면만큼 맛있지만 건강한 식품도 많다. 그러니 참자, 사지 않으면 안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이날은 첫 장보기인 만큼 최소한의 것만 구매하기로 다짐했다. 2L짜리 삼다수 6병과, 사과 한 알, 요거트를 하나 샀다. 사과야 씻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요거트야 배고플 때 조금씩 퍼 먹으면 되니 샀다. 입국한 지 딱 7일이 된 아직까지도 요거트는 반 통도 먹지 못했다. 대용량은 사지 말자. (대원칙에 추가.)
저렴한 물도 많은데 두 배 값하는 삼다수를 산 이유. 나는 물 맛에 예민한 편이다. 한국에서도 맛이 이상한 물들을 가끔 만나는데, 해외에서는 맛 편차가 더 심하다. 상상 이상으로 비리고 느끼한 물을 만나기도 하고, 석회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지 끓이고 나면 전기 포트 바닥이 하얘지는 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물로는 커피를 내려도 맛이 없다. 정말로, 기가 막히게 맛이 없다. 그런 맛없는 물은 당장 욕실로 쫓겨나 양칫물로만 사용한다. 이런 불쾌한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안전한 선택은 아는 물을 사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아무래도 한국과 가깝고 한인 인구가 많아서인지 한국 물을 구하기도 쉬웠다. 아는 물이 없을 때 차선으로 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인터내셔널 브랜드의 물을 사는 것이다. 코카콜라나 네슬레의 물을 사면 실패가 없었다.
비싼 값을 주고 산 삼다수는 캄보디아에서의 첫 커피를 내리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아침에 커피를 내려서 한 모금하고 나면, 그제야 정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원두는 한국에서 사 온 코스타리카의 엘 땅께 옐로 허니 위스키. 달큼하고 깊은 향이 너무 좋다. 아침 식사는 보통 이렇게 커피 한 잔으로 마치는 편이라, 요리가 들어올 공간이 애초부터 없었다. 아침에 밥을 먹는다는 게 나는 어릴 때부터 이해가지 않는 행위 중 하나였다. 일어나자마자 뭘 먹고 싶지는 않던데. 아침부터 계란 프라이 기름 냄새는 좀 싫지 않나... 잔잔한 음악에 가끔 컵 달그락 거리는 소리, 거기에 커피 향 얼마나 완벽해.
나는 아침으로는 커피를 마시고(아침을 안 먹는 것과는 다르다. 내게 아침 식사란 커피.) 점심밥은 대부분 기관 근처 식당에서 사 먹고 있다. 때문에 저녁 한 끼만 스스로 해결하면 된다. 이마저도 출장팀과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이 많아서, 혼자 저녁을 먹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나는 두부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두부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순두부도 좋고, 판두부도 좋고, 말린 두부도, 유부도 좋다. 콩으로 된 것이라면 다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콩밥도 좋아하고, 병아리콩으로 만든 후무스도 정말 좋아하고, 두유도 좋아하고, 콩국수는 여름의 소울푸드이다. 그런 내가 요리를 버리고 조리를 택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식재료는 자연스럽게 '두부'였다. 숙소 근처 한국 식품 마트에 가서 두부와 김치를 사 왔다. 간장만 사려고 했었는데, 간장 용량이 너무 크기도 했고, 간장을 주방으로 들이고 나면 왠지 엄청나게 요리를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곁들여 먹을 것을 찾다가 김치를 샀다. 김치도 물론 맛김치로 샀다. 포기김치를 자르려면 아주 큰 일이기도 하고, 숙소에 있는 도마를 김치 국물 빨갛게 이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두부는 먹을 만큼을 떼어서 끓는 물에 찬기가 빠지도록 데웠다. 그리고 대충 썰어서 김치에 곁들여 먹었다. 그런데 너무 맛있잖아. 역시 두부는 최고야. 한두 번 먹다 보니 두부가 금방 식는 것이 아쉬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식기에 담을 때 두부 삶은 물도 함께 담아내어 먹고 있다. 그럼 마지막 두부 한 조각까지 따끈하게 먹을 수 있다. 간소해지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무심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간소함 속에서도 이런 작은 디테일에 최선을 다하는 재미가 있다.
마트에서 사 온 김치가 생각보다 내 입맛에 잘 맞아서, 이런 배리에이션도 시도하고 있다. 살짝 데친 브로콜리와 싱싱한 파프리카를 그냥 먹기에는 심심하니까 김치와 함께 먹어보았는데, 맛있다. 외국인들이 김치를 샐러드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야채와 곁들여 먹으니 간이 맞고 좋구나.
이 정도면 두부 광공이 아니라 맛김치 광공이라 해야 하나.. 김치만은 대량 구매 금지 조항의 예외 식품으로 해야겠다. 매 끼 곁들여 먹이 참 좋네. 전주집 김치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한국 식품 마트에서 고구마도 사보았다. 물기가 적은 밤고구마 같아 보여 망설임 없이 샀는데, 6알 만 원... 내가 생각했던 가격보다 너무 비쌌지만 한국에서 온 고구마라 비싸다고 한다. 그래... 한국에서도 감자, 고구마 참 비싸지...
숙소에는 전자레인지와 오븐이 있다. 몇 알 레인지에 돌려서 먹어볼까 하다가, 이왕 굽는 거 그냥 오븐에 한 번에 잘 구워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주말엔 고구마로 몇 끼 때워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토요일에 일어나자마자 고구마를 구웠다. 180도에 30분 정도 구웠는데, 속살에서 단단함이 살짝 느껴져서 30분을 더 돌리니 아주 아름다운 군고구마가 되어 나왔다. 그리고 따뜻한 고구마는 두유와 먹어야 제맛이므로... 긴급히 숙소 앞 슈퍼에 가서 두유를 사 왔다. 두유를 살 때에 나는 단 하나의 지표를 보고 두유를 선택한다. 여러 두유 중 당 함량이 가장 낮은 두유를 사면 항상 실패가 없었다. 내 입맛에 달달한 두유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보통 당 함량이 높은 두유일수록 콩 함량도 낮은 저급 두유일 확률이 높다. 오늘 먹은 두유는 그냥.. 그냥 괜찮았다. 더 맛있는 두유를 사려면 대형 쇼핑몰을 가야 지나 괜찮은 두유를 건져올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고구마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일요일 저녁에 다시 꺼내 먹었다. 누워서 EBS의 위대한 수업의 이번 주 강의를 몰아 보는데 입이 심심해서 차를 한 잔 내리고, 고구마를 썰어 곁들여 먹었다. 차라고 해봐야 전기 포트에 물 끓이고, 시판 카모마일 티 1팩을 넣은 것 뿐이었다. 3분 만에 이렇게 작은 상을 차려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좋은 생활이란 생각이 들었다.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데 많은 손품과 시간이 들지 않는 것도 만족스럽지만, 물에 데치거나 굽는 정도의 조리만 거치니 설거지 거리도 거의 없다. 기름기로 미끈거리는 식기를 씻을 일도 없고, 물로만 휘 헹구어도 될 정도의 설거지뿐이다. 준비와 설거지에 15분 이상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방에서 음식 냄새도 나지 않고, 주방이 깔끔하게 유지되는 것도 장점이다. 이전에 요리를 할 때에는 조심을 해도 주방 바닥에 물이나 떨어진 식재료 조각들이 굴러다녀서 따로 치워야 했는데, 이제는 바닥 청소도 필요하지가 않다.
요리 없는 일주일, 너무 만족스러웠는데 앞으로도 잘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