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기내 엔터테인먼트는 명불허전이었다. 1년 만에 탔는데도 보고 싶은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알코올 음료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았다.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영화나 한 편 보려던 나의 알찬 계획 중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기내식의 기쁨은 누릴 수 있었다. 해산물 기내식을 신청해두었다.
더 가벼운 것이 더 맛있다.
해산물 기내식은 물론이고 채식 기내식도 상당히 맛있다. 내가 처음으로 채식 기내식을 신청했던 때가 떠오른다. 우리는 고기를 식단에서 배제하면 식사가 부실해진다거나, 조촐해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내가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채식 기내식을 신청하면서는 한 끼 식사가 줄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하는 마음이었다. 지루하고 긴 비행시간 중에는 즐길 거리라고는 기내식과 와인 정도니까, 그중 기내식을 채식으로 신청한다는 것은 내게 큰 재미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 중요한 식사의 기쁨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단단히 마음 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정말 큰 마음, 큰 선심이 모였을 때 비로소 채식 기내식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웬걸, 채식 기내식은 상당히 훌륭한 한 끼였다. 간단한 토마토 파스타에 구운 야채, 샐러드와 과일이 나왔었는데 풍족하고 맛있게 먹었었다. 오히려 내가 먹었던 기내식 중 맛으로도 탑 5 안에 들었던 것 같다. 내 한 끼 때문에 죽은 동물이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기뻤을 식사였는데 맛있기까지 하다니 아주 경쾌한 마음으로 마무리 했던 기억이 있다.
토르텔리니와 토르텔로니
대한항공의 해산물 기내식. 토르텔로니와 연어가 나왔다. 오늘은 해산물 기내식을 주문해두었다. 프놈펜에 가면 아무래도 해산물 요리를 맛있게 먹기 어려워진다. 어렵다는 말보다는 비싸진다는 말이 더 맞겠다. 현지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감당하고 싶지 않아 지는 가격이다. 그래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고 싶다는 사욕을 이기지 못하고 해산물 기내식을 신청했다.
내심 대구요리가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연어 구이와 페스토 파스타, 구운 야채가 나왔다. 샐러드에는 대하가 한 마리 올라가 있었다. 이 파스타는 라비올리인가 토르텔리니인가 가물가물하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토르텔로니'라고 부른다고 한다. 라비올리는 속을 넣어 만들기는 하지만 만두처럼 동그랗게 말아 놓은 모양이 아니고, 토르텔리니는 더 작고 보통 수프에 넣어 먹는 듯하다. 토르텔로니, Tortelloni. 토르텔리니, Tortellini. 스페인어에서 rón가 증대사이고 rito가 축소사이듯이, 이탈리아어에서는 -oni가 증대사, -ini가 축소사인 걸까.
토르텔로니 Tortelloni
라비올리와 비슷한 크기이다.
속으로는 보통 치즈, 허브를 사용한다.
세이지, 버터 등 가벼운 소스로 요리해 먹는다.
토르텔리니 Tortellini
아주 작다.
속으로 보통 고기를 사용한다.
수프에 넣어 먹는다.
연어는 내가 좋아하는 생선은 아니지만 새로운 파스타를 먹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꼭 채식 기내식을 주문해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고기 없이 식사를 하다 보면, 고기가 맛있다는 건 얼마나 강력한 편견인지 실감하게 된다. 고기는 우리 생각보다 좋은 식감이나, 좋은 맛을 내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우리는 이상하게도 신선하지 않았거나, 적정 조리시간을 넘긴 고기의 맛에 너무 관대하다. 고기 조리에 들이는 정성의 절반만이라도 야채에 쏟는다면, 더 훌륭한 식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생선이나 해산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고기가 제일 맛있다'라는 믿음을 시원하게 버린 만큼 '해산물이 맛있다'라는 이 이상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을 뿐.
레드 카펫 위에서 코로나 검사를
길지 않은 비행이었다. 밥을 먹고 잠시 책을 읽고, 하늘에 떠있는 달을 구경하다 보니 프놈펜에 도착했다.
이번 출장에서는 어쩌다 보니 VIP의 입국 코스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그저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들이 가장 먼저 내리고, 먼저 내리면 그때부터는 계속 앞서갈 수 있으므로 모든 절차를 빠르고 쾌적하게 통과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비행기 하선에서부터 이동, 입국 절차 등 모든 단계의 일들이 별도의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서 긴 통로를 빠져 나간 뒤로는 걸을 일이 없었다. 따로 버스를 타고 이동다. 입국 절차도 마찬가지로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여권을 매니저가 걷어가서는 어딘가로 분주히 무전을 하고 움직이더니, 잠시 후 어디서 인지 입국 스탬프를 받아서 다시 돌려주었다. 입국 심사대를 지나지도 않고 입국 절차가 끝났다.
그리고 입국 시 모든 승객이 받도록 되어있는 코로나19 테스트도 별도 장소에서 따로 진행되었다. 레드 카펫이 깔려있었고, 원탁을 둘러싸고 소파가 놓여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소파에 앉아서. 소파에 앉아서...! 테스트도 두 가지를 받았다. 5분이면 결과가 나오는 간이 테스트와 PCR 검사를 받았다. 간이 테스트 결과 음성이 나오자 귀가해도 좋다는 안내를 받았고, PCR 검사 결과는 익일에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절차는 친절하고 쾌적했고 신속했다. 과연, 이렇게 살아서는 특권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대우를 받으며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피로하게 모든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별도의 사람들과 자원이 배정되어 있었고, 별도의 공간이 할애되고 있었다. 내가 이들의 세계를 전혀 모르고 살았듯이 그들도 아마 나의 세계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진짜' 퍼스트 클래스 승객이 아니었기 때문에, 짐은 일반 승객과 똑같이 러기지 클레임에 가서 찾아야 했다. 짐 찾으러 가는 길, 훅 끼쳐오는 덥고 습한 공기. 여기는 프놈펜, 이제 내 세계가 될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