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시케와 에로스
오늘은 C. S. 루이스의 책에 대해서 남긴다. 브런치 첫 페이지에는 C. S. 루이스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 S. Lewis
읽을 생각이 없던 책이었는데 사람들의 입 속에서, 상황 속에서 자꾸만 떠올라 상기되는 책들. 우연이든 인연이든 운명이든 이 마주침의 지독한 반복은 이겨내기 쉽지 않다. 그런 책들은 결국 읽게 되고 만다. C. S. 루이스의 책이 그랬다.
C. S. 루이스의 이름을 처음 귀에 걸어 본 것은 아마 「나니아 연대기」였던 것 같다. 영화도 책도 직접 접하지는 않아서 그가 대단한 작가라는 걸 알게 되는 데 그쳤다.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전 직장 후배를 만나서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가 이야기가 책까지 흘러갔다. 그녀는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있다고 했다.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라는 말도 남겼다. 그렇지만 무교인에게 이 책의 제목은 너무나 거대한 것이라, 손을 뻗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다. 출장 나와서 알게 된 D와 책 이야기를 잠시 나누게 되었는데, D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C. S. Lewis의「Till We Have Faces」을 꼽았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신은 영어보다 한국어로 책을 읽을 때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D는 미국에서 자라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편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언어가 주는 신선함과 수려함이 있으니까. 때마침 그 책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라는 표제로 번역되어 몇 달 전 ebook으로도 출간되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D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이기도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면모를 가진 낯선 사람이었다. 그는 좀 희한한 데가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책으로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같은 걸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알 수는 있으니 책의 첫 장을 얼른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책으로 C. S. 루이스를 읽을 때가 왔구나, 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도입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 오래된 이야기를 재해석해 보고 싶은 생각은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시작되어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다. 그렇게 치면 살아오는 내내 이 책을 써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작가는 하나의 이야기를 평생에 걸쳐서 완성해낸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프시케와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프시케의 언니(오루알)의 관점에서 새로 풀어냈다. C. S. 루이스의 말에 의하면 '재해석'해낸 것이다. 살아오는 시간에 걸쳐서.
프시케의 미모를 질투한 아프로디테 여신이 아들인 에로스를 시켜 프시케가 추남과 사랑에 빠지도록 사랑의 화살을 쏘도록 한다. 그러나 에로스는 프시케를 찾아갔을 때 자신의 화살에 손을 찔려 그만 프시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프시케는 사제로부터 죽음 또는 괴물과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듣게 되고, 피테스 산 정상에 보내진다. 피테스 산에서 프시케는 서풍의 신의 도움으로 에로스의 궁전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신랑인 에로스를 만난다. 그러나 에로스는 밤에만 나타나며 얼굴을 프시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프시케를 찾아온 언니들은 이야기를 듣고 에로스가 뱀이나 괴물일 것이라며 추동하여 프시케가 밤에 등불을 밝혀 에로스의 얼굴을 보게 한다. 프시케가 등불의 기름을 에로스 어깨에 떨어뜨리며 에로스가 깨어나고, 에로스는 프시케의 의심을 꾸짖으며 날아가버린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찾아가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몇 가지 임무를 시킨다. 프시케는 고초 끝에 에로스와 재회하여 영혼의 여신이 되는 것으로 원래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C. S. 루이스는 프시케의 언니인 오루알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화와 이야기의 큰 줄기가 사뭇 다르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오루알은 그 둘의 이야기를 볼 수 없으므로. 오루알이 피테스 산 궁전에서 만난 프시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에로스를 이미 사랑으로 섬기고 있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 하루아침에 얼굴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자를 신랑으로 섬기고 있다면 나였어도 불 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실체부터 알아야 한다고,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C. S.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루알의 사랑은 빗나간 사랑이라는 점이다. 오르알은 평생 세 명의 인간을 사랑했다. 여동생 프시케와 은사 여우 선생, 그리고 경비대장 바르디아. 그렇지만 그 세 명을 향한 사랑 중 어느 하나 화답받은 사랑은 없다. 프시케는 에로스를 사랑하였으며, 여우 선생은 그리스를 평생 그리워하다 죽었고, 바르디아는 여왕 오루알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었다. 오루알은 상대방이 환대할 수 있는 사랑을 베푼 적도 없고, 상대방에게 기다리던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지독히도 빗나간 오루알의 사랑이 표독스러워 보이면서도 평생을 외로웠을 그녀의 삶이 슬퍼지기도 한다.
스페인에서는 운명의 짝을 'mi media naranja(나의 오렌지 반쪽)'이라고 부른다. 오렌지를 반으로 가르면 그 속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라 본래 하나의 오렌지였던 조각 둘만이 그 모양이 딱 맞게 된다. 그래서 오렌지 반쪽은 한치의 오차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나만의 반쪽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반쪽짜리 오렌지를 이리저리 돌려 맞추어보는 모습, 딱 떨어지는 오렌지를 찾았을 때의 기쁨과 환희를 생각해보면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현이다. 그리고 곱씹어볼수록 사랑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인간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사랑의 표현이 오렌지만큼이나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사랑에 대한 정의와 기대, 표현이 있다. 상대방 사랑의 무늬와 결이 나와 맞지 않으면, 어느 쪽이든 괴로워지고 만다. 그러니 우리는 절박하게 나의 '반쪽'을 찾아다닌다. 이 사람은 사랑의 말을 잘해주지 않아서, 이 사람은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않아서, 이 사람은 나를 위한 봉사를 해주지 않아서, 이 사람은 질투가 심해서, 이 사람은 나만을 바라봐주지 않아서. 우리는 다른 오렌지를 찾으러 떠난다.
가령, 나의 반쪽 오렌지는 이렇다. 나는 내가 상대를 통제하거나 인도하는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그저 믿고 응원할 수 있고, 바라보고 있으면 닮고 싶어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는 상대를 신뢰하려고 최선의 노력하는데, 어떤 상대는 질투심을 보이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랑이 없다'며 슬퍼했다. 소유욕이 곧 사랑인 사람과 나는 서로를 사랑해줄 수 없었다. 결국 우리에게는 사랑에 대한 기대가 반쪽 오렌지 무늬처럼 새겨있으니, 우리들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나머지 반쪽을 찾아내지 못하면 영영 우리들은 아물릴 수 없는 영혼인 것이다.
나는 어떤 종교의 신자도 아니지만, C.S. 루이스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신에 대한 사랑은 완전해질 수 있다. 신에 대한 사랑은 하나다. 그것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오루알의 사랑과 프시케의 사랑이었다.
나의 얼굴을 찾아, 신의 얼굴을 찾아……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소설의 주인공이자 프시케의 언니인 오루알의 인생 최후의 독백이다. ‘큐피드와 프시케 이야기’를 변형시킨 루이스는 화자이자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프시케의 언니 오루알을 등장시킨다. 신이 자신의 사랑을 앗아가 버렸다며 신에게 고소장을 내미는 오루알. 그러나 종국에 그녀는 평생 베일 뒤에 감춰 두었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데…….
루이스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조지 세이어는 “만약 이 책이 익명으로 출간됐다면 아무도 C. S. 루이스의 작품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그만큼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소재와 문체, 구성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작가의 다른 책들과 차이를 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루이스가 말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며, 작가 스스로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것으로 아내 조이 데이비드먼에게 헌정되었다. 이번 판은 기존 양장에서 무선으로 개정한 것이며 표지도 새롭게 갈아입었다. (출처: 리디북스)
작품명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 Till We Have Faces
저자명 C. S. 루이스 | C. S. Lewis
역자명 강유나
출판사 홍성사
1. Antonio CANOVA (1757 – 1822),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 Front view, http://musee.louvre.fr/oal/psyche/psyche_acc_en.html
2. 본인 촬영, 2021.12.
3.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75403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