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처음 쿤데라의 책을 읽은 건 재작년 초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 제목이 너무 멋있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읽으려고 계속 생각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인데, 서점에 갈 때마다 매번 재고가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읽었다.
이 책은 소설로 분류되지만 소설과 에세이 그 사이 어디쯤이라고 보는 게 맞는 거 같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어느새 쿤데라 본인도 끼어들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쿤데라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썼는지, 평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통 인과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돼서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 된 이야기는 제목과 같은 ‘불멸’―책 속에서 쿤데라는 이 책 제목이야 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지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이다. 진시황이 꿈꿨던 그런 불멸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래서 잊혀지고 싶어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런 불멸에 관한 이야기.
나는 그들을 증오할 수 없다. 그들과 나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어떤 공통점도 없다.
아녜스는 아빠를 떠올리면서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만났던 한 사내와 자신은 아무런 연관성도 친밀감도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미워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 미워할 수 없다면, 같은 이유로 사랑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모든 관계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건가.
감정이란 우리 몰래, 그리고 대개는 우리 육체를 거스르면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더는 감정이 아니라 모방이요 감정의 과시다.
슬픔이나 감동, 사랑이나 동정 같은 감정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 거리를 걷다가 뜬금없이, 연인과 마주 보다가 문득. 가끔은 처음 느끼는 듯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와 이 마음 상태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물론 슬프고자 작정하고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마음에 남는 감정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치는 그런 것들이다.
나는 나의 고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이 말. 위대한 문구다. 이 문구는 고통이 비단 자아의 토대일 뿐 아니라, 자아의 확실하고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며, 가장 존중되어 마땅한 것, 즉 가치 중의 가치임을 함축한다.
쿤데라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책 초반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은 많지만 몸짓은 적다. 사람이 갖가지 몸짓을 취할 수 있겠지만 그 수는 사람 수보다 적을 수밖에 없어서, 사실 사람이 몸짓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에 사람이 구속되어 있다고.
같은 맥락에서 생각은 그 사람의 자아를 나타낼 수 없다고, 개인의 생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사실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보편적으로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고. 알고 보면 고통이야말로 자아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고민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을 주제일 것이다. 내가 유일한 존재임을―내가 유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는 일단 ‘그렇다’라고 가정을 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에―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길은 공간에 대한 경의다. 길 한 토막 한 토막 그 자체에 하나의 의미가 있어, 우리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도로는 의기양양하게 공간의 가치를 떨어트려, 오늘날 사람들에게 공간이란 그저 이동의 한 장애요 시간 손실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
그리하여 삶의 시간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극복해야 하는 하나의 장애가 되어 버렸다.
길 한 토막 한 토막에 의미가 있다는 말. 분명히 맞는 말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말이다.
모든 상황에서 효율과 최단을 추구하는 요즘, 이런 말을 하면 바보 취급당하기 십상이지만, 사람은 느리게 갈수록, 느리고 더 느리게 가다가 심지어 멈춰버린 그 순간에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걸음이든 생각이든 마음이든.
부끄러움은 우리가 범하는 실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우리 선택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우리가 되어 있다는 데서 느끼는 모욕과, 그 모욕이 곳곳에 노출되는 데 대한 견딜 수 없는 느낌에 바탕을 둔다.
겨울철 길 한복판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순간에도 분명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보다 더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고 그래서 숨기고 싶은 무언가―외모라든지 가난이라든지―를 남에게 들켰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는 우리 이미지 뒤에 숨을 수 있고, 우리 이미지 뒤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우리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매일 밤 내가 상상하는 어떤 사람의 이미지는 사실 그 사람과 무관하다. 생김새라든지 말투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겠지만 자아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과 술을 마시는데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나는 널 조금 동경했어.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찾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면서도 그럭저럭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는 네 모습이 쿨 해 보였거든. 널 따라 하다가 내 대학 생활을 조금 망쳤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충격이었다.
내가 나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따라하고 싶을 만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이 그랬고, 무엇보다 누군가 나를 동경하고 있었다는 점이 그랬다.
어떤 점에서 이런 간극이 생겨났을까? 사실 그 친구가 만들어낸 내 이미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친구가 혼자서 만들고 동경했던 내 모습은 그 친구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또 다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유머는 사람들이 아직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네. 오늘날에는 그 경계를 분간할 수가 없어.
종종 다른 사람이 가볍게 던진 유머에 정색하며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넷상에서 이런 부류를 ‘선비’라든지 ‘종착역’이란 말로 비꼬지만 가끔 태반에 이르는 사람들이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을 접한다. 그럴 때면 ‘이게 사실 유머가 아닌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머는 삶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과 마찰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을 허허, 하는 실없는 웃음으로 넘길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유머는 쓸 데 없는 감정 소모를 줄이고 삶을 더 힘있게 나아가게 해주는 중요한 동력이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간할 줄 아는 곳에서만 유머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 바꿔 말하면 요즘 시대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말인데, 이 말에 내가 공감한다는 점이 조금 씁쓸하다.
왜냐하면 오직 여성만이 그 무엇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어떤 희망을 간직할 수 있고, 미래로 우리를 초대할 수 있기 때문이오. 여성이 없었던들 이미 오래전부터 믿지 않았을 수상쩍은 미래로 말이오.
남녀 간에는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이것을 원인으로, 남녀 간에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자는 강력범죄 피해자 비율을 들면서 남자가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여자는 두 성별 모두에게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더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남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여자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 사고방식의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를 기반으로 한다면, 이 논쟁은 설득이 불가능한 사안이 되어버린다. 이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위 문장처럼, 세상이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기계적이어서 어느 도로에서나 금속 부품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을 때, 세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바다에 풍덩 빠지게 되는데, 쿤데라의 바다는 너무 깊고 넓어서 자꾸만 감탄하면서 읽었다.
수영장에서 본 한 몸짓에서 이 책을 써낸 것처럼, 사소한 무언가로부터 시작되는 사유의 발자국은 자꾸만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