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수강은방학때 Mar 07. 2020

전쟁과 평화 - 1

레프 톨스토이


대학 마지막 학기. 그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인상적이었던 수업을 들었다. 예술에 관한 수업이었는데, 지금 내가 책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읽게 된 계기가 된 수업이기도 하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눈을 갖추는 게 중요해요. 현상이나 사물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만의 눈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거든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남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게 되죠."

이렇게 길게 말씀하셨던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이런 맥락이었다. 반드시 자기만의 해석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 그래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

그런 교수님께서 또 어느 날은 이 책을 두고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을 다 읽게 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기껏해야 30년도 못 산 나로서도 최근 분명히 알게 된 진리가 있는데,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교수님께서 했던 그 말이 기억에 남아서 이 책을 읽게 됐다.

생각했던 대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됐다거나 엄청난 insight가 생겼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배웠다고 하면 비슷하겠다.


많은 고전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책 역시 한 가지 주제로 귀결되진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에게 역사란 무엇인지, 그 거대한 사건 속에서 개개인의 인간상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가지고 지킬 수 있는 여러 가치들에 대해서 보여준다.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법이니까요.

'이해한다'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무언가를 분명히 알고 깨달았다는 의미고, 다른 의미는 상대방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의미에는 분명하고 중요한 차이가 있음에도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해'의 의미는 전자의 성격이 짙은데 그래서인지 여러 갈등 상황에서 '내가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므로 이해할 수 없다.'라는 회로가 작동한다.

하지만 분명 상대방이 의도하는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도 충분히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는데, 이때 이해가 의미하는 바는 후자에 해당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상황에서도 너그럽게 그 상태를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끝없는 갈등은 '이해'라는 의미를 전자에 국한해놓고 벌어지는 일들이다.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며, 이것을 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은 드물다.

가족이나 친구,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내가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생각과 상대방이 나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이런저런 사정들.


'모든 것이 마리야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명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가면서 어디서 구원을 찾고, 삶이 끝나면 저기, 무덤 속에서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다 부질없다는 것과,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가 확실히 위대하다는 것뿐이다!'

안드레이는 공작은 전쟁터에서 포탄에 맞아 쓰러져 사경을 헤맨다. 그토록 동경하던 나폴레옹이 눈 앞에 서 있지만 죽음의 문턱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하고 차라리 눈 앞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만이 무한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삶에는 분명히 돈이나 명예, 좋은 차와 넓은 집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 있다.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그것을 느끼지만 그게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거나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죽여도, 도둑질을 해도, 인간은 여전히 행복할 수 있거늘……

도박 빚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로스토프는 나타샤의 노래를 들으면서 행복감에 젖는다. 그러고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영원한 슬픔과 좌절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무엇이 나쁜 것인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살고, 나는 대체 무엇인가?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러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선이냐 하는 문제는, 그 판단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이런 질문들은 아마 수 천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질문이다.

무엇이 나쁜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일. 동물을 학대하는 일. 어린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 욕을 하는 일... 이런 행위들이 나쁜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좋은 것인가? 남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일. 동물을 사랑하는 일. 상대방에게 미소를 건네는 일. 어린아이를 소중히 대하는 일... 이런 행위들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하다 보면 이 생각들의 기저에는 굉장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근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이유들을 분명히 인지하고 고민할 수 있다면, 살인이라는 같은 결과의 서로 다른 두 경우를 두고서 어느 한 경우는 나쁘고 다른 한 경우는 나쁘지 않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농노해방은 도덕적으로 몰락해가는 자신에 대해 후회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거야.

도스톱예스키의 죄와 벌,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냥 살아가는 사람과 무언가 이루거나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혼자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직업이나 일을 통해 이르는 궁극적 단계가 바로 이런 단계라고 생각한다. 내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욕구.

오늘 날 수많은 복지 사업에 힘을 쏟고 있는 빌 게이츠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가장 두려운 일이 무엇인가요?"

빌 게이츠는 대답했다.

"어느 날 제 뇌가 멈춰버리는 게 가장 두려워요."


어떠한 진리도 두 인간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인간의 견해라는 것이 한없이 다양하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같은 구절을 두고서도 여러 해석이 쏟아진다. 그러면 그중에 그럴듯한 것을 하나 골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렇게 퍼지고 퍼져서 어느 날에 이르러서는 다른 해석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박해한다.

그냥, 코끼리를 눈 앞에 데려다주고는 만져보라고, 이게 바로 코끼리라고 이야기해주면 족하다.


'인생이, 기쁨으로 충만한 모든 인생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데, 나는 이 막히고 비좁은 틀 안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조바심내고 있을까?'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살아서 행복해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요즘 이렇게 행복에 대한 생각이 들 때마다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어떤 한 사람과, 아주 오래전 넓은 초원에 서 있는 어떤 한 사람을 상상한다. 그리고는 누가 더 행복할까? 하고 생각해본다.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하지 않았던, 먼 곳을 하루아침에 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할까? 아니면 주식이든 직장이든 결혼이든 부동산이든 생각하지 않던 사람이 행복할까?

그러다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모든 사람에게 승인되고 있는 이 사회 전반의 허위는, 아무리 그가 그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해도 새로운 무엇처럼 번번이 그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나는 시도해보았지만, 언제나 알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는 나와 같은 것을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어느 날 누군가 뿅 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더 착하게 만든다거나 계몽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만 두고 봐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일을 성공시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대단한 정치가가 나타나 우리나라 좌우진영 간에 갈등을 해결 할리가 만무하고, 갑자기 천재적인 지도자가 나타나 전 세계에 만연해있는 국가주의를 타파 할리도 없다.

그런 일은 유일하게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