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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Dec 24. 2021

실패의 경험은 많은 것을 선물했다.

건축을 놓아주기로 했다.


 아이들을 책으로 키우고, 내가 읽여주는 책을 누군가에게 권유해주고, 판매수수료를 받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실적이 좋았기에 월 300-500만 원의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 일을 계속할 줄 알았고, 나는 판매직의 최고 직급의 국장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국장이 될 수 없었다.


 지역국의 실적이 대부분 우리 팀에 의해 발생되었고, 우리 팀이 국장으로 배출된다는 건 현재 지역국장의 매출이 감소하는 구조였다. 그랬기에 쉽사리 내보내 주지 않았다. 그때는 그 국장이 참 원망스러웠다. 본인의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많은 비리가 있었고, 그 피해는 온전히 그 아랫사람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퇴사 후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런 비리들 때문에 권고사직되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국장이 되었다면, 아마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 같다. 옳지 않은 것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직장은 계속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이 출판사 판매직을 그만두었지만, 직장은 계속 다녀야 했다. 경제적으로 이미 독립되어있어서, 나의 씀씀이도 그랬고, 그사이 아이들도 이미 많이 커서, 시간만 허락한다면 일을 지속하고 싶었다. 다시 찾은 곳은 인테리어 회사였다. 12월 31일 퇴사 후 1월 2일 출근을 하였다. 백화점 명품시계 인테리어 회사였다. 작지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회사였고, 사실 회사에서 배운 것들을 통해 인테리어 창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가족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회사에 이력서를 냈던 사람이 나 혼자였음을 알았으면 입사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사무실에는 대표님, 대표님 사촌동생, 대표님 지인 2명 그리고 나까지 5명이었다. 

 

 사실 나는 도면 작업을 했기에 주간 근무를 했다. 하지만 백화점 인테리어는 야간작업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여직원과 둘이 있어야 할 일이 많았다. 신입도 아닌 경력직으로 들어갔던 회사였는데, 그 여직원은 나에게 탕비실 정리를 하라고 했다. 당연히 탕비실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을 안 했었기에,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번갈아 가며 하는 것이기에 기꺼이 했다. 사실 백번 생각해도 할 수 있는 일이 기는 하지만, 그 여직원이랑 하기 싫었다. 사무실에 둘이 있어야 하는 일이 많은데, 난 아이 둘이 집에 있는 엄마이기도 하고, 근무시간만 딱! 채워 근무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으니, 그랬기에 근무시간에 이탈하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그 여직원은 혼자 있던 사무실 시간이 많아 자유로웠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 때문에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가야 했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대표님은 점심시간 즈음 혹은 오후에 출근을 하셨기에 나만 먼저 퇴근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다른 분들끼리 저녁을 드시고 야간작업을 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분들과 친해질 만한 시간이 없었다. 사실 그런 여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낮에 목공소에 다녀와야 하는 일이 있어서 대표님 사촌동생분과 동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의 '그런 거 같죠?' 이 한마디가 내가 퇴사를 결심해야 할 만큼 큰일이 될 줄은 몰랐다. 대표님이랑 여직원이 친한 사이라고 나보고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전했고, 나도 '그런 거 같죠?'라고 한마디 하고는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다 들었다. 그러고 나서 여직원이 저녁시간에 했던 이야기들을 나에게 전했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 여직원에게 그런 이야기를 왜 했냐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대표님이 그 사촌동생분께 이야기를 했고, 그 말에 그 사촌동생은 내가 대표님과 여직원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얘기한 것처럼 이야기가 전달이 되었다. 대표님이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런 일은 물론 없다. 하지만 가족관계이시고, 사실 내가 오기 전에 네 분 이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나 혼자 외지 사람인 것을 나는 아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소리를 하겠냐고 이야기했고,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런 소리 들으면서까지 계속 다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의 도면들을 내가 다 작업하고 있었기에, 재택근무를 제안을 하셨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수락을 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다른 사람이 전하는 타인에 대한 말은 동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직원을 뽑을 때까지 재택근무로 일하겠다고 대표님께 이야기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이들도 케어하고, 일도 하고 즐거웠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고 직원을 뽑아 일을 정리를 하게 되었고, 한 달은 아시는 건축사 분의 일을 재택으로 도와드렸다. 그렇게 지나고 재택근무 가능한 다른 사무실에 도면 작업을 하게 되었다. 한옥을 설계하는 사무실이었다. 한옥건축이 매력 있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커서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서 출근 제안을 몇 번 거절했었는데, 재택으로 라도 도와달라고 하셔서 한 달 정도 일을 했었다. 그런데 급여가 이체가 되지 않아 일을 진행할 수 없었고, 그 월급은 일부 받았고, 나머지는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근로계약서라도 써둘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권리는 내가 찾는 거다. 누군가가 나를 배려해 주겠지 하는 것도 나의 이기심이다.


실패의 경험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일을 다시 하고 싶었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왜 시간을 낭비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설계사무실을 다니면서 현상설 계하며 기획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 현재 일을 하면서도 큰 도움이 되고, 출판사 영업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던 시간들은 사람을 만나는 두려움을 없애주었고, 그때 만났던 인연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람을 만날 때 신중해져야 하는 경험,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 한다는 생각 등. 실패의 경험들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사업을 하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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