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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Dec 24. 2021

건축가가 되고 싶던 '이대리'

LH 아파트를 설계하던 나는 건축가가 될 줄 알았다.


 회사 직원들과 밥을 먹다가 연봉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5년제 건축학 전공 학과를 나와 1년 경력이 차이나는 분들과 같은 호봉을 받고 있었다. 매일 같이 밥을 먹는 분들이기에 서로 비밀이 없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연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 연봉을 이야기하는 순간, 1년 경력 차이가 나는 대리님 표정이 안 좋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차이 나지는 않지만, 내 연봉이 더 많았던 거였다. 아파트 설계일을 하기도 하지만, 현상설계팀에 있었기 때문에 일을 수주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였고, 한 달에 한 프로젝트를 수행했었기에 3주는 야근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열정'이라는 아이가 버텨주었고, '꿈'이라는 아이가 나를 이끌어 주었다.


그렇다. 나는 건축가가 될 줄 알았다.


 사실 직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학과를 지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학교 원서를 넣는데 하향지원이었던 원서는 그 학교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학과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5년 제라는 타이틀을 보고, 뭔가 전문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지원했던 학과가 나의 전공이 되었고, 나의 직장이 되었다.


 연봉 이야기를 첫 번째로 했던 이유는 그만큼 잘했었다. 회사를 다니는 직원인데, 사장처럼 생각하며 일했다. 완벽하지 않으면 퇴근하지 않았고, 개인생활은 없을 정도로 회사일에 몰두했다. 내 디자인이 셀렉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5년 후 계획했던 아이가 생겼다.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한다고 해도, 휴직을 하는 시간이... 건축사 경력까지 6개월 남았는데... 원래의 계획은 건축사 시험을 치르려고 준비했던 기간만 채우면 휴직 후 시험 준비하며 퇴사를 하려고 했다. 그 기간 동안 아이를 낳을 계획이었는데, 계획이 다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그 순간 또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처음으로 그렇게 쉬어봤던 것 같다. 5개월 때 휴직계를 제출했으니, 출산까지 5개월이라는 시간은 꽤 길었다. 휴직을 빨리했던 이유는 '열등감'이었다. 배가 나와있는 상태로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임신한다고 프로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프로답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무급휴직 5개월, 출산휴직 3개월, 육아휴직 1년 후 나는 회사로 가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빨리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에 둘째를 빨리 가졌다. 첫째와 둘째의 터울은 16개월 차이가 난다. 휴직을 연장하고, 회사에서는 다시 복직을 하라고 권유받았지만, 그때의 나는 후배들이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열등감'때문에 갈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건축은 참 매력적인 학문인데, 좋은 건축주가 되기로 '이대리'는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모든 일에 열정적인 것 같다. 육아를 할 때에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큰아이는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홈스쿨을 할 준비를 하고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조금 더 많이 안아줄걸...' 참 후회가 많이 남는다. 책을 참 좋아한다. 아이들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랐었다. 전집을 많이 사주었다. 그 이유는 내가 매일 독서관에 아이들을 데려가면 좋은데,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책을 많이 사줬다. 그 당시 50평 집 벽에 책장이 벽을 다 둘렀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집을 많이 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사'라고 하는 영업사원분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웅진다책의 영업 팀장님은 만나면 정신이 없어졌다. 산만하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다른 출판사 책과 비교해서 질문을 많이 했는데 다른 출판사 책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속으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면 더 잘하겠다.'라고. 그렇게 생각만 하고 책은 구매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마감날 전화가 와서 그때 몇 번 만나 정이 들었는지, 그때는 구매를 했다. 

 그리고 둘째가 돌이 될 즈음,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은 내가 다시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에 휩싸였다. 그런데 설계회사에는 다시 갈 수 없었다. 돌아가면 다시 야근의 시작인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규모가 작은 인테리어 시공회사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3개월을 다녔다. 은행 인테리어 회사였고, 공사 관리를 하고, 중간에 발생되는 문제점에 대해서 해결만 하면 되었기에 어렵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님이 와서 아이들을 봐주시고 계셨기에 마음 놓고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주말에 일을 부탁한 실장님의 권유에 2주 연속 주말 출근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하려고 이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 즈음 신랑도 어머님도 힘들어하고, 아이들도 조금 더 케어해주면 안 되냐고 일을 그만두기를 권유했고, 그때의 나는 내가 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었기에 그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전업주부가 되는 줄 알았다.


 인테리어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고, 집에서 전업주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너무 즐거웠다. 사실 씀씀이가 커서 회사 다니면서 쓴 돈 때문에 카드값이 좀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찰나에 웅진다책 팀장님이 찾아왔다. 교육이 있는데, 교육을 받으면 내가 산 책도 수당이 나오니 직원가 같이 생각을 할 수 있고, 아이 키우는데 필요한 교육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웅진다책 교육을 받아보지 않겠냐고 했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이 팀장님 보다는 잘하겠다.'라는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웅진다책 영업사원이라는 선생님의 이름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기도 했었고, 책을 많이 구매하다 보니 다른 출판사와의 비교분석이 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인들이 책을 구매하기 전에 나와 많이 이야기를 하고 구매를 하는 편이었다. 지인 판매로 시작했기에 실적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책을 권유하고, 판매하고, 돈을 받는다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열심히 활동했던 카카오스토리와 블로그는 그런 과정에 한 몫했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그렇게 하는 영업방식에 신선함을 느꼈는지 본사 방송에 출현해서 사례를 이야기하고 그랬다. 그리고 SNS로 하다 보니 고객이 원거리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택배관리를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영업방식과 고객의 반응을 살피는 일을 그때 배웠던 것 같다. 사원에서 6개월 만에 팀장으로 그렇게 교육회사를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리고 나는 국장이 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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