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살인자의 기억법』
미지근한 물 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책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 문학동네)』
잊는 것에 대한 고뇌와 잊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지만 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세계가 사라졌으며 결국 한 인간이 무너졌다. 그가 아니다. 인간의 나약함이 놀랍다.
알츠하이머(치매). 실체가 없는 기억을 파괴하고 환시가 나타나게 한다니 참으로 이상한 병이다.
기억이 형태를 이루어 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내가 경험한 이 모든 세계를 뇌가 모두 만들어낼 수 있다면 실재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분명 알츠하이머 환자에게는 환시가 실재이다. 저마다 자신의 뇌가 만들어내는 환시 속에서 그게 진실인 줄 알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론 즐겁게 때론 고뇌하며 쌓아온 나의 세계가 사실은 허상에 불과하면 어쩌나 상상해 보며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곧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갑자기 실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망각과 환시에 사로잡혀 내 모든 세월이 공(空)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이다. 지금 내가 실제라고 믿고 있는 이 세계가 설사 실제 세계가 아니더라도 나는 이 세계에서 끝까지 지금의 나를 기억하며 내 존엄성을 지키고 품격 있게 살다가 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세계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정신 차린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어쨌거나 뇌에 관심이 생긴다.
[2017. 10. 21.]
그림출처:
http://cfile3.uf.tistory.com/image/13374D4F4D2C51B3020B10
http://image.zdnet.co.kr/2014/08/28/nrDKVoygozo5C4yOWnuk.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