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성실하고, 적당히 약삭빠르게 살아라..
1994년 10월 어느 날 아침
통계학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느지막이 강의실에 들어가 앞쪽 출입문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군 제대 후 복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캠퍼스 ‘아싸’ 신세가 된 터라 이름도 잘 모르는 후배들만 가득한 강의실에 굳이 일찍 들어가 앉아 있을 일이 없었다. 뒤를 돌아봤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빈 자리가 많았다. 다른 수업도 아닌 전공필수 수업, 게다가 호랑이 교수님으로 소문난 K교수님의 괄괄한 성격 때문에 결석은 커녕 지각하는 학생도 없던 수업이었는데 이렇게 빈자리가 많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거의 수업시간이 끝나갈 무렵, 강의실 앞쪽의 출입문이 열렸다. 통계학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1시간 가까이 지각한 그 학생은 강의실에 들어올 생각은 안 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망부석처럼 멈춰 서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교수님을 향해,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 학생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교수님, 다리가 무너졌어요. 다리가..”
힘겹게 강의실 벽에 손을 짚고 서 있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교수님이 학생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의도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서울 생활 몇 년만에 제법 서울 지리에 익숙해진 내 귀에 꽂힌 단어들, 성수대교, 16번 버스, 교통마비, 영동대교로 우회...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던 그날의 통계학 수업...
그날 이후로 TV와 신문을 도배했던 참혹하고, 어이없고, 슬펐던 이야기들은 25년이 넘게 지난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여학생의 얼굴도 잊어버렸고, 그 여학생이 계속 통계학 수업을 들었는지 아니면 정신적 충격으로 휴학을 하면서 수강을 철회했는지 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강의실 벽에 기대어 울음을 삼키며 그 학생이 내뱉었던 몇 개의 단어들과, 그때의 서늘하고 비현실적인 느낌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리고, 내가 지금 그 여학생의 부모 나이 즈음이 되어 보니, 지옥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스무 살 갓 넘은 여대생이 그 순간 얼마나 무섭고 끔찍했을지 그저 측은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그 학생은 자기 눈앞에서 버스와 승용차가 깜쪽같이 사라져 버린 후 자기가 타고 있는 버스마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으리라. 버스에서 내린 후 아마도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서 성수대교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빠져나온 후, 길에 주저앉지도,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초인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다시 학교로 향했다.
강을 건너려면 영동대교나 동호대교를 다시 한번 건너야만 하는 상황... 그 여학생은 자신의 발밑을 무섭게 흘러가는 시커먼 강물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상황을 직접 겪지 않은 나도 글을 쓰는 이 순간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떨리고 무서운데... 그 여리고 작은 여학생은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용기를 얻었던 것일까?
꽤 오래전에 해병대에서 모병을 담당했던 제대군인 분과 우연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해병대 신병 모집 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요구하는데, 성적은 거의 보지 않고 출결상황과 생활태도가 기록된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다는 이야기였다. (오래전 이야기이다. 아직도 해병대 신병 모집 시 생활기록부를 요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현행 생활기록부에서는 '준법정신', '협동심' 등등을 '가', '나', '다'로 점수화하지는 않는 듯하다.) 여하튼, 그분의 이야기를 옮기자면 이렇다.
'얼핏 생각하면 해병대 같은 곳이 소위 '일진'이라 할만한 아이들, 싸움 좀 할 줄 아는 아이들'을 뽑을 것 같지만 그런 학생들은 뽑지 않습니다. 왜냐면, 총알이 날아오고 전우가 죽거나 다치는 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도망가는 사람들이 그런 '일진' 부류의 인간들이죠. 겉으로는 가장 용감해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비겁한 부류들... 하지만, 성실하고 협동심 강한 아이들, 3년 개근상 받은 착실한 학생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희생하고 책임감을 발휘합니다.'
지금은 물론, 그 당시에도 나는 이 설명을 들으며 솔직히 좀 슬펐다. 결국, 비겁하고 잔머리 굴리는 인간들은 살아남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만 고생하거나 다치거나 죽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과거 유명한 코미디언이 이야기한 대로, 이 세상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대조차 ‘조금은 비겁하게 살아야 행복한'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부모란 원래 쓸데없는 걱정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인 법... 우리 호비와 호지가 그 여학생처럼 구사일생의 상황을 겪는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라고 가르쳐야 할지.. 그런 쓸데없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편으로는 다른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 아이들도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나와 아내는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아주 모순되게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들고 무서운 일을 실제로 겪는다면, 난 그저 “직장이 뭔 소용이고 학교가 뭔 소용이냐? 너무 용기 내지 말고, 너무 성실하려 애쓰지 말고 그냥 집으로 와라.. 엄마 아빠 품으로 달려와라. 엄마 아빠가 위로해 줄게”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통계학 수업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겠니? 아무리 회사일이 급하더라도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잖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호구가 되어서야 쓰겠니?.... 그저, 너무 많이 애쓰지 말고, 너무 심하게 성실하지 말고... 적당히 눈치 보면서 적당히 약삭빠르게...
꼭 살아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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