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던 아파트 근처에 있던 반디 앤 루니스가 문을 닫았다.
귀국한 김에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살던 동네를 1년 반 만에 다시 가보았다. 처음에는 갈 생각이 딱히 없었는데, 아내가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중학교 시절 친구를 만나러 가자길래 잠시 시간을 내서 동네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들러본 동네는 조금 변한 듯하기도 했고 아닌 듯하기도 했다. 서래마을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데 앞장선 아이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파리바게뜨가 없어졌어.’
‘어? 못 보던 음식점이 새로 생겼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물었더니 아이들은 잠시도 고민 안 하고 사래마을 골목 초입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집에 가고 싶단다. 다행히 쌀국수집은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였다. 둘째 딸 호지가 가장 친했던 친구인 파비엔느(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4)와 가끔 쌀국수를 먹곤 했던 곳이었다. 헤어진 친구를 회상하는 건지, 오랜만에 맛보는 쌀국수 맛을 음미하는 건지, 호지는 점심 식사 내내 말이 없었다.
일 년 반 동안 빵가게와 음식점만 사라지거나 새로 생긴 게 아니었다.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에 제법 큰 호텔이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고는 끝내 폐업했다. 철거작업이 이제 시작된 듯한데, 며칠 전 강풍에 공사장 가림막이 뜯겨 나가면서 아파트 주민들이 꽤나 놀랐다고 텔레비전 뉴스에까지 보도되었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 진입로를 슬쩍 올려다보니, 어라! 우리가 살던 아파트 외벽에 새롭게 페인트 칠이 되어있다. 우리가 살 때에는 조금은 때 묻고 칙칙한 외벽이었는데 새롭게 단장한 모습을 보니, 뭐랄까, 나랑 헤어지고 나서 기다렸다는 듯이 쌍꺼풀 수술을 해버린 옛 여자 친구를 만난듯한 느낌이었다. ㅎㅎ
하지만, 가장 안타까웠던 변화는 반디 앤 루니스의 폐점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조조 영화를 보러 가곤 했던 메가박스 영화관, 맛깔난 음식으로 우리 가족들을 유혹하곤 했던 지하상가의 음식점들은 대부분 그대로였는데, 유독 반디 앤 루니스 서점만 불이 꺼진 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엄청나게 거액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1억 몇천만 원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 처리되었다는 뉴스가 떠올라 마음이 더욱더 씁쓸해졌다.
아파트에서 지하철역이 가까우면 역세권, 숲이 가까우면 숲세권 아파트라고 한다는데, 나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대형 서점이 있는 ‘서세권’ 아파트에 살 수 있었던 지난 몇 년의 세월이 많이 감사했었다. 시간 날 때마다 아내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산책 겸 찾아가던 곳이었는데, 시대 변화에 적응 못한 오프라인 서점이라는 공룡은 그렇게 조용히 ‘죽어서 누워있었다.’ 사라져버린 서점이 아쉬운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서점 앞에서 서성이던 그 짧은 시간에도 몇몇 사람들이 서점 앞에 와서는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아. 사라지고 없어진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 생긴 것도 있었다. 아파트 옆 공원 맞은편에 일 년 육 개월 전에는 없던 천막이 하나 새로 생겼는데, 박근혜 대통령을 복권하는 것이 '멸공통일'의 길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붙여 놓았다. ‘멸공’이라는 단어를 가장 최근에 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국민학교’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우리 가족이 살았던 옛 동네는 지난 일 년 반 동안 서점을 하나 잃고 그 대신 천막을 하나 얻은 셈이었다. 사색과 공존의 공간이 사라지고 구호와 독선의 공간이 새로 생긴듯한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나라 땅에 태극기를 세워놓은 거는 이해할 만 한데 성조기는 왜 세워놓은 걸까? 흠.. 궁금한데 한번 가서 물어봐도 되려나? 성조기 세워놓은 이유이니까 영어로 물어봐야 하나?
“익스큐즈미. 와이 디드 유.. 어.. 음..
캔 유 스피크 코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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